독일의 역습
한스 쿤드나니 지음 / 김미선 옮김 / 사이 / 288쪽 / 1만3900원
[ 김보영 기자 ]
금발의 여성이 푸른 바탕에 열두 개의 별이 그려진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운다. 그림의 제목은 ‘앙겔라 렉터(Angela Lecter·그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악명 높은 식인귀 ‘한니발 렉터’에 빗댄 만평이다. 최근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퍼지며 인기를 얻었다.
지난달 3차 구제금융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돼 그리스는 간신히 국가부도 위기를 면했다. 최악의 사태인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도 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메르켈 총리와 독일이 보인 강경한 태도가 유럽연합(EU)에 파열음을 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EU에서의 제왕적 입지를 활용해 그리스를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협상 타결 직전 구제금융보다 그렉시트가 더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메르켈 총리의 ‘잔혹함’을 강조한 만평이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이유다. 유럽 언론계에서는 그리스 사태에 대한 독일의 대응에서 60년 전 ‘나치’의 그림자를 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대표적인 유럽 지성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괴테대 명예교수도 “독일 정부가 독일이 반세기 동안 쌓아온 정치적 자산을 하룻밤 새 탕진해 버린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을 정도다.
EU의 다른 국가들이 독일을 보는 시선은 통일 독일이 등장한 1871년 이후 줄곧 불안했다. 최근 불안은 가속화하고 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보적 위상을 차지한 독일이 연합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의혹이 증폭되면서다. 그리스 사태는 의혹을 확신으로 바꿔 놓았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독일 말을 듣지 않으면 한 국가의 경제가 파괴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역습》은 주변국의 두려움에 찬 시선이 여과 없이 반영된 책이다. 저자인 한스 쿤드나니 영국 버밍엄대 독일연구소 선임위원은 자국의 경제적 우선 순위를 다른 유로존 국가에 밀어붙이는 독일을 ‘지경학적(geo-economic) 거인’으로 묘사했다. 중국도 지리적 이점과 경제력을 이용해 급부상하고 있지만 무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히 지경학적이지는 않다. ‘경제적 단호함’과 ‘군사적 자제’가 결합된 독일이야말로 순수하게 경제 제국주의를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쿤드나니는 독일이 수출을 기반으로 경제를 끌어올리면서 ‘오프쇼어링(off-shoring·기업이 업무 일부를 해외로 이전시키는 것)’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를 하도급 체제 안에 편입시키고, 경제 호황기에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에 무책임하게 대출을 남발해 위기를 불렀다고 비판한다. 그리스 사태도 독일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유럽 국가의 재정 규율 해이가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힘의 불균형 상태로 발족한 유럽경제공동체에 내재된 문제라는 것이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다. 독일만의 특수한 역사적 궤도를 긍정·부정적 의미 모두에서 포괄적으로 일컫는 ‘존더베크(Sonderweg·특수한 길)’라는 말도 따로 있다. 예컨대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겪은 적이 없다. 제국의 내적 긴장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사회적 제국주의 노선을 따르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1871년 통일된 뒤 불어난 몸집도 유럽 내 독일의 모호한 위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맞추기에는 지나치게 강했고, 완전히 패권을 쥐기에는 약했다. 다른 유럽 국가가 연합 세력을 조직하게 된 이유다. 그 반작용으로 독일 내에서는 타국 간 연합에 대한 두려움이 일면서 이른바 ‘포위의 변증법’ 상황이 발생했다.
마르크화보다 약세였던 유로화를 통해 수출에 날개를 달아 ‘권리’를 챙겼으면 그에 걸맞은 ‘책임’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국의 무역수지 흑자를 줄이고 채무국들의 경제 성장을 도와야 자타공인 유럽의 패권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쿤드나니는 “독일이 이런 접근법을 줄곧 거절했으며, 유로존이 더욱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나치 체제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변했다’고 주장하는 독일이 실제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1945년 이후 독일이 변화를 겪었다고는 하나 1871년의 통일과 1990년의 재통일이 이뤄지고 난 뒤 나타난 이념적 변화는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유럽에서 세계대전 이전 혹은 그 무렵처럼 반(反)독일 연합세력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