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 안고 가는 김영란법] "김영란법은 수입 소고기 장려법…한우농가 줄도산 부를 것"

입력 2015-08-26 18:23
'선물 3만원 제한'으로 망가진 꽃농가 전철 밟나

한우 4000억·굴비 1900억원대 피해 예상
농가 "농축산물 고급화 권하더니…" 분통


[ 고은이 / 임원기 기자 ]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때문에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시행령에 한우, 과일세트 등 선물용 농축산물 상품까지 뇌물로 간주하는 내용을 포함하겠다고 밝히면서다. 연간 한우 소비량의 50%, 사과·배의 40~60%가 명절 선물용으로 나간다. 부정부패를 막으려다 1차산업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농민들 “희망이 없다”

전북 완주군에서 한우 37마리를 키우는 축산농 박일진 씨(48)는 요즘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김영란법에서 뇌물로 간주하는 선물 금액 상한이 5만~10만원 선이 유력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한우 판매량이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일반적인 한우 선물세트 가격은 10만원을 훌?넘는다.

박씨는 “17년 전 처음 축산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소를 키우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이젠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김영란법 같은 외부 요인 때문에 사업을 접을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전체 한우농가 9만9000호 중 9만호가 박씨처럼 100마리 미만을 기르는 중소농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돼 고가 한우세트 선물이 금지되면 한우산업 전체가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초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팔린 한우 선물세트 가격은 10만~20만원이 35%, 20만원 이상 50%, 10만원 이하는 7%밖에 되지 않는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걱정이 많기는 과일농가도 마찬가지다. 충남에서 배 농사를 짓는 김주환 씨(59)는 2대째 운영하고 있는 과수원을 아예 처분할까 고민 중이다. 김씨는 “배는 명절 선물 수요가 거의 절대적인데 배 선물을 막겠다고 하면 당장 올해 물량부터 사갈 곳이 없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과일 선물세트는 절반(50%)이 5만원 이상이다.

○“고급화하라더니…”

정부의 기존 농축산업 정책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값싼 수입산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농축산물 고급화 정책을 펴왔다. 농민들은 정부 시책에 따라 시설과 사료 투자를 늘려 농축산물 품질을 높였다. 국산 농축산물이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은 뛰어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한우 1인 식단가는 7만7000원에 달한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고가 농축산물 선물을 막으면 결국 국내 프리미엄 시장은 무너지고 저가 외국산 시장만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우를 비롯?인삼, 굴비 등 한국 고유의 토종식품도 설 자리를 잃는다. 김홍길 전국한우협회 회장은 “결국 김영란법은 수입 고기를 애용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김영란법이 아니라 ‘수입고기 장려법’”이라고 꼬집었다. 이기수 농협중앙회 축산경제 대표는 “장기적으로 축산농가는 한우, 한돈을 포기할 테고 결국 국민은 수입육 외에 다른 선택을 못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김종태 새누리당 의원은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해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농·축·수산물을 제외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권익위는 농·축·수산물만 수수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권익위 관계자는 “특정 분야를 예외로 인정하면 형평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꽃 산업 전철 밟을까

선물 금지 정책으로 관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은 전례가 있다. 화훼산업이다. 공무원 선물 한도를 3만원으로 제한한 ‘공무원 행동강령’ 시행(2009년) 이후 1조원에 달하던 연간 화훼 생산액은 7400억원 규모로 급감했다. 줄어든 자리는 중국산 저가 꽃이 채웠다. 화훼농가는 5300여곳에서 3600여곳으로 줄었다. 화훼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2010년 1억달러에 달하던 화훼 수출 규모는 2014년 4000만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산업 특성이나 국산 및 수입품의 가격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책부터 시행한 게 문제였다. 장만형 한국화훼협회 사무총장은 “보통 축하난이 10만원, 예식장 3단 화환이 15만원 선인데 실거래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3만원으로 규제해버리니 화훼산업이 아예 망할 판”이라며 “한국 문화에서 꽃은 뇌물이라기보다 축하나 위로의 뜻을 전하는 것인데 요즘엔 이런 미풍양속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김영란법은 공무원은 물론 언론인, 사립학교 임직원 등 민간 영역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어 파급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한우는 4154억원, 굴비는 1950억원대 피해를 입을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화훼산업처럼 줄도산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김홍길 회장은 “비리 공무원 한두 명 잡자고 1차산업을 죽이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고은이/임원기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