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영의 벌어야 사는 사람들①]"나에게 돈은 난치성 강박이다"…16년간 달려온 40대 주식장이의 삶

입력 2015-08-18 14:25
수정 2015-09-03 13:59
[ 정현영 기자 ]

그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그래야 했다. '돈(money)보다 꿈(dream)이 먼저'라고 외치던 젊은 시절의 노래는 다시 들을 수 없다. 벌어야 사는 시대는 바빠야 정상이다. '안녕?'이 아니라 '바쁘지?'로 안부를 묻는다. 시인들은 가난이 슬픔이고 슬픔을 고통으로 느낀다고 지금을 한탄한다.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 한 복판에 서서 물어봤다. 당신한테 돈은 무엇입니까.

'페달을 멈추면 쓰러진다' 16년간 달려온 40대 주식장이의 삶

"돈에 대한 나름의 멋진 철학이 있으면 좋겠지만, 어설픈 철학은 인생에서 늘 '마이너스 요소'였다. 돈 버는 행위 자체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잃는 것이 더 많았던 날들이다. 돈은 강박에 시달리게 했고, 나에게 외로움을 알려줬다."

국내 경제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폭풍우를 맞닥뜨린 시기, 대학 4학년이던 최성한(44·가명)씨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16년 전인 1999년, 운명처럼 등 떠밀려 입사한 곳이 바로 C증권사 대전 지점. IMF 사태 직후라서 당시엔 생명보험사와 증권사가 영업직원을 가장 많이 뽑았다.

K생명보험회사와 C증권사 모두 최씨의 입사를 허락했지만, 그의 선택은 증권사였다.

"당시 보험사에선 적지 않은 연봉(약 3000만원)을 제시받았었다. 증권사에선 월급 50만원을 받고 6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평생 영업맨으로 살기보다 막연해도 진취적인 주식시장에서 부대끼면서 배우고 살아보자는 생각이 컸던 셈이다."

그렇게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최씨는 고객들의 계좌를 불려주면서 증권맨으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5년 뒤인 2005년. C증권사 본사 내부공모로 뽑은 단 두 명의 투자분석부 연구원으로 뽑혀 서울로 올라왔다. 25대 1이란 높은 내부 경쟁률을 뚫고 지방에서 올라온 대가는 그의 기대보다 컸다.

주식 플레이어의 눈으로 돈을 바라보게 된 최씨. 서울 영등포 골목에 자리한 월세 23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살던 그는 주말부부였다. 일주일에 꼭 한 번씩 대전엘 내려갔고, 반복될수록 씀씀이는 커졌다. 집주인에게 매달 내야하는 '23만원만 벌자'라고 다짐했던 것이 돈을 벌어야 했던 이유였다고 떠올렸다.

C증권사의 대표 자산운용본부 운용력으로 성장해온 최씨는 2010년 회사를 나왔다. 직접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고, 펀드매니저로서 드디어 주체적인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얼마 전 그는 자문사에서 나와 여의도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주식을 매매하고 있다. 그간 돌보지 못한 건강을 챙기고, 자유로운 주식 매매를 실험하고 싶어서다.

여의도 증권가(街)에선 이른바 '매미(펀드매니저 출신 개인투자자)'로 불리는 그는 여의도에서 산다. 16년여 동안 고객의 계좌로 돈을 벌어온 이 40대 주식 플레이어는 '페달을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에 자신의 인생을 비유했다.

"나에게 '돈을 번다'는 행위는 존재의 이유다. 주식 플레이어로 살아온 내가 일을 하는데 벌지 못한다면 내 몸값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돈을 번다는 게 나에게는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아닌지에 대한 적나라한 성적표다."

▶ 30~40대를 주식시장에서 살았다.

"내 인생의 중심에 돈만 있다고 생각하면 창피하다. 내 삶의 명분이 너무 약해져서다. 펀드매니저로 일할 시기에는 그래도 '고객들의 쌈짓돈을 불려준다'는 명분이 있었다.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했다. '내 돈을 벌겠다'고 나와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졌다. 주변 사람을 만나는 횟수도 줄어든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머니가 부족하지 않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고 아버지가 병원비 부담에서 벗어나 안도하는 모습을 봤다. 그제서야 돈 버는 행위가 스스로 경시하고 무시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해 왔다고 본다."

▶ 돈은 꼭 필요할까.

"가족의 건강 악화 등 돌발적인 변수에 대비하려면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펀드매니저로 일할 당시 보스(boss)의 어머니는 큰 병을 앓고 있었다. 24시간 간병인이 꼭 필요했고, 병원비만 1년에 1억원 이상 들어갔다. 꼬박 5년을 그렇게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그때 보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여지껏 돈 벌었나봐'였다. 잊혀지지 않는 말이? 너무 커다란 명분만 내세워 지금껏 돈을 뒤쫓은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 계기였다."

▶ 돈을 많이 벌고 싶었나.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닷컴 버블이 꺼진 주식시장에서 큰 돈을 잃은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대청댐 위에 올라 서기도 했다. 아버지와 친인척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가족들에게 돈으로 너무 많은 피해를 줬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팔 다리를 끊어서 그 빚이 청산된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박했지만 이 때도 난 '빚을 줄여야겠다'가 목표였지 부자가 되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식의 집착은 없었다. 다만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힘있게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지를 이 시기에 알게 됐다."

▶ '돈에 대한 집착'이란 무엇일까.

"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본 적은 없다. 자라면서 용돈도 부족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아버지, 남동생까지 3대째 비교적 안정적인 월급쟁이 집안이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월급으로 가족이 먹고 사는데 익숙했다.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질 계기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돈의 가치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가령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어졌거나 부모님이 평생 장사로 어렵게 돈을 모았거나 좋은 집에서 살다가 월셋방으로 옮겨 갔거나 돈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야하는 불행한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고 모은다. 그리고 정말 큰 돈을 번다."

▶ 어떻게 해서 돈을 모았나.

"2006년 연말부터 은행계좌 잔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증권저축계좌를 개설한 뒤 본사 준법감시부에 직접 신고하면서 처음으로 주식을 사고 팔았다. 월세 23만원이 매매 이유였다. 그 해 연말쯤 계좌를 열어봤더니 원금 1300만원이 4000만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망치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서울 생활하면서 인적네트워크 관리로 매달 50~100만원 가량 술값을 지불하던 시기다. '이 술값이 3~4년 뒤엔 3000~4000만원으로 불어날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돈을 출금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복리의 마술'을 이 때부터 눈으로 봤다."

▶ 여의도에서 부자의 기준은 얼마일까.

"얼마 전에 KB은행에서 조사해 내놓은 분석보고서를 본 적 있다. 이 보고서는 한국사회에서 '순자산 30억원 이상이면 부자'라고 하더라. 자본시장의 가장 중심에서 살아보니 여의도에선 부자의 기준이 30억원 보다는 분명히 높은 것 같다. 그 동안 주변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100억원은 벌어야 돈 좀 벌었구나' 인정해 준다. 당연히 나의 기준은 아니다."

▶ 의식주(衣食住)가 어렵지 않아도 계속 벌어야 사는 이유가 있나.

"프로야구 선수가 타율 4할을 넘기면 다음 게임에 안 나오나. 매일 안타와 삼진이 타율로 계산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벌어야 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벌기 위해서 일한다고만 볼 수도 없다. 일을 하는데 돈을 못 번다는 것은 스스로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라 번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하게 지금 인생을 살고 獵募?증거로 본다. 반대의 경우라면 난 고민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산다는 얘기다."

▶ '슬픈 돈'에 대해 알고 싶다.

"나에게 돈은 강박이다. 해외로 가끔 여행을 가더라도 손에서 스마트폰 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을 놓지 못한다. 보유 중인 주식의 현재가 창을 들여다봐야 해서다. 그 주에 나온 애널리스트(기업분석가) 분석보고서를 모두 읽지 못하면 주말에 잠도 설친다. 매사에 예민하다. 별 것 아닌 일에 불길한 징조를 덧붙여 불안해 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혈압 망막 혈당 등 강박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은 하나씩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 강박을 버릴 수도 없다. 너무 오랜 습관으로 불편하지 않고 불안하지도 않다. 늘 고민거리다."

▶ '부자 주머니' 속 돈의 모습을 엿본다면.

"'외롭다'는 부자들이 많다. 내가 알고 있는 성공한 부자들은 전부 외롭단다. 이들은 또 '외로운 걸 안다'고 고백한다. 꼴찌가 아닌 일등이라서 겪어야만 할 숙명의 특권 정도로 받아들인다. '일등을 하면 외롭지만, 꼴찌를 하면 괴롭다'고 입을 모은다. 실패로 괴로운 것보다 차라리 외로움이 견디기에 낫다고 여긴다. 돈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으면 좋겠지만, 어설픈 의미 부여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집착과 고집만 남길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두 발 자전거의 페달에 그는 비유했다. '자전거 페달을 구르다 멈추면 쓰러지는 것 아니냐'고 물어왔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치열하게 살아온 대가로 치부한다는 그의 인생은 하루하루 시청률에 울고 웃는 일일드라마와 같았다.

정현영 한경닷컴 기자 j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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