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우 기자 ]
정부는 지난달 10일 국가과학기술심의회를 열고 국방, 인문·사회분야를 제외한 19개 부처 373개 주요 연구개발(R&D) 사업에 대한 내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규모는 올해 12조9350억원에서 2.3% 줄어든 12조6380억원이다. 예산 당국의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기획재정부 역시 R&D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만큼 내년 R&D 예산 감축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R&D 예산이 축소되는 것은 1991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하지만 정부의 R&D 예산 감축을 둘러싸고 과학기술계에서 찬반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임윤철 기술과가치 대표는 “정부 R&D 사업의 부진한 성과와 추진 과정의 비효율성을 감안하면 당분간 구조조정 성격의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며 “창의적 연구결과를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개발자들의 책임 의식을 키울 수 있는 상향식(bottom-up) 과제를 더 많이 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중국의 급격한 추격을 물리치고 저성장 위기에서 탈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R&D 축소는 설익은 한국의 성장 기반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다”며 “오늘의 복지를 핑계로 내일의 진정한 복지를 위한 투자를 포기해선 안된다”고 반박했다.
찬성 / 퍼주는 하향식 지원으론 성과 한계…개별 과제 줄이고 융합연구 더 투자를
부처별 제각각 R&D사업 이젠 개편할 때
미흡한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나 경제의 허약성을 생각하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계속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각종 R&D 사업의 부진한 성과와 추진 과정에서의 비효율성을 감안한다면 당분간 예산은 늘리지 말고, 구조조정을 요점으로 하는 ‘조정’ 성격의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 2016년 예산을 포함해 3년간의 R&D 예산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편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과 없는 R&D 사업은 축소시켜야 한다. R&D 사업의 기술 이전이나 기술 사업화가 안 되는 이유는 연구과제의 기획이 부실한 탓이 크다.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하향식(top-down)으로 R&D 사업을 기획해 예산을 주는 방식이 최선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하향식 과제가 많은 것은 예산을 집행·관리하는 정부 관계자와 관리기관들의 ‘편의성’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좀 더 창의적 아이디어로 R&D 성과를 내려면 정부 예산을 상향식(bottom-up) 과제에 더 많이 배정해야 한다. 상향식 R&D 사업은 그 관리가 다소 까다롭지만 창의적 연구 결과를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연구개발자들의 책임 의식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가 혁신체제(NIS·national innovation system)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형이었다. ‘창조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패스트 팔로어 시대에서 연구개발자들은 기술전문가로서 어떤 R&D 과제를 기획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 시대에선 쉽지 않다. 기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 스스로 시장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R&D 과제를 기획할 수 없다. 정부 R&D 사업개편과 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창조경제를 위해 시작한 융합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부처별로 강제 구획된 영역에서 R&D 사업을 제각각 기획 수행하는 현 체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창의적 융합연구를 기대하기 어렵다. 또 개별 해당 사업예산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면서 융합연구 예산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들의 R&D 수행 능력을 제고할 목적으로 하는 정부의 각종 사업은 마중물이 되는 좋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R&D 사업들이 효과를 보려면 정부의 관리 체계를 바꿔야 ‘창조경제’로 연결된다. 현재는 1~2개 정부 부처만 이 유형의 사업을 관장하고 있다. 이를 모든 부처가 주관할 수 있도록 바꿔 경쟁적으로 기술집약형 중소·중견기업을 육성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부처 간 관리의 효율성 관점보다는 자율적 경쟁의 관점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젊은 신진 연구자들이 의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일정 규모 정도의 연구비가 신진 연구자들에게 강제 배분되도록 하는 R&D 사업을 특별히 추진해 이들이 균등한 연구 기회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을 때 의욕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전체 R&D 예산을 조정하면서도 다음 세대에 대한 예산은 국가적 R&D 역량 제고를 위해 일정 부분 더 투자해야 한다.
이런 업무 중심에 정부가 신설하는 과학기술전략본부가 있다. 이 신설조직에 기업 마인드를 접목해야 한다. 앞으로 5년간 과학기술전략본부의 성과가 향후 한국의 과학기술, 한국의 경제성장 궤도를 결정할 것이다.
반대 / R&D 줄이면 한국 성장기반 ‘흔들’…日은 6년째 확대, 미래투자 축소 안돼
투자 줄면 양도 줄고 질도 떨어질 수밖에
정부가 연구개발(R&D) 사업 예산을 2.3%나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외환위기 중에도 큰 폭으로 늘려왔던 R&D 투자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경기 침체로 세수는 줄어들고, 보건·복지·고용·교육 분야의 재정 수요는 늘어나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정부의 직접 투자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민간이 R&D 사업에 투입하는 인건비·교육비·설비투자 등에 대한 세제 지원도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정부의 느닷없는 예산 감축이 민간의 R&D 의지까지 꺾어버리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정부는 우리의 R&D 투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4.15%로 비율로 보면 세계 1위이고, 투자 규모도 세계 6위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한다. 이제는 양보다 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순위는 그저 순위일 뿐이다. R&D 성과는 비율과 순위가 아니라 실제 투자 규모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투자가 줄어들면 양도 줄고,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R&D 투자 규모는 미국의 10% 수준에 불과하고, 중국 일본 독일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규모다. 정부의 직접 투자 비율도 24%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가 투자 규모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추격을 물리치고 저성장의 위기에서 탈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R&D 투자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설익은 우리의 성장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통한 효율화로 투자 감축에 따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판단도 믿을 것은 아니다. 정부가 내놓은 R&D 혁신방안은 예산 절감이나 효율화를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R&D 사업의 중심을 중소·중견기업으로 옮기고, 낯선 ‘한국형 프라운호퍼 제도’를 정착시키고, 대학과 정부 출연연구소에 중소·중견기업의 연구소 역할을 맡기는 일에 적지 않은 추가 예산이 필요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관료와 정책전문가 중심의 R&D 체제를 연구자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추가 비용도 투입해야 한다. 효율화에 의한 투자 절감은 그런 일을 끝낸 후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압축 성장 과정에서 애써 외면했던 사회적 격차 해결을 위한 노력을 미룰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의 R&D는 오늘이 아 灸?내일을 위한 투자다. 진정한 내일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산업혁명 이후 모든 선진국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진실이다. 일본 기업이 6년 연속 R&D 비용을 확대하고 있고, 그중 30%의 기업이 역대 최대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현실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복지를 핑계로 내일의 진정한 복지를 위한 투자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을 두 손 들어 환영했던 과학기술계는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두고,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창조경제를 통해 적극적인 경제부흥 정책을 실천하겠다던 대통령의 공약이 퇴색해 버렸기 때문이다. 2017년까지 국가 R&D 투자를 GDP 대비 5%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던 공약을 달성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국정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던 과학기술계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 애써 움켜쥐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놓아 버려야 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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