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톈진(天津)

입력 2015-08-14 18:04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톈진은 중국 수도 베이징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의 북부 중심 도시로서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울 인천 경기를 합친 면적(1만1632㎢)에 인구는 1000만명이 조금 넘는다.

원래 지명은 직고(直沽)였는데 약 600년 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아버지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건국한 넷째 아들 주체(朱·훗날 영락제)는 원의 대도(현 베이징)에서 몽골세력을 몰아내고 황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주원장이 장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사망하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남하작전을 시작한 곳이 직고였다. 대운하를 타고 내려가 정권을 잡은 영락제는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직고에 톈진(天津)이란 이름을 내렸다. ‘천자의 나루’라는 뜻이다.

국제적인 항구도시가 그렇듯 톈진은 많은 바람을 탔다. 19세기 중국을 탐내는 외세열강들의 각축전이 톈진에서 벌어졌다. 1856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애로호 사건이 계기였다. 영국 등은 톈진을 점령하고 톈진의 8배에 달하는 지역을 조계지로 차지했다. 1902년까지 톈진과 인근 지역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첸?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9개국의 조계지가 들어섰다.

이후에도 톈진의 시련은 계속됐다. 위안스카이 같은 군벌이 점령하는가 했더니 1923년엔 중화민국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 점령당했다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러 미군이 진주하기도 했다. 국공내전 중이던 1949년 1월에는 34만명의 공산군이 13만 국민당군을 29시간 만에 패퇴시킨 톈진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찍 개방되면서 상하이와 함께 중국 2대 도시로 커가던 톈진은 공산당 정권 수립 후에는 오히려 차별대우를 받았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에 집중하면서 관문도시에는 상대적으로 지원을 줄인 탓이었다. 톈진이 살아난 것은 199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덕분이었다. 이후 중국 4대 직할시의 하나로 보세구역, 빈하이 경제개발구 등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 기업 2500여개가 입주해 있고 교민 4만여명이 산다.

1976년 대지진 여파로 2만4000여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던 톈진은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 도시다. 침탈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 힘을 키워가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일찍 깨우친 사람들이 산다. 톈진항에서 그저께 밤 대형 폭발사고가 있었다. 사상자가 수백명이 넘고 경제적 피해도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빨리 떨치고 일어나길 기원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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