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 비틀대는 중소기업에 '어퍼컷' 날리는 은행

입력 2015-08-13 18:15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수도권의 수출 중소기업 S사. 고희를 바라보는 이 회사의 Y사장은 요즘 다리에 힘이 없다. 술과 담배, 골프도 안 하며 20년 이상 열심히 수출에만 몰두해온 그가 비틀거리는 것은 무더위나 시장 여건 때문이 아니다.

물론 엔화 약세로 일본 기업과의 경쟁이 격화하면서 수출이 전성기에 비해 30%가량 줄긴 했다. 하지만 그에게 결정적인 ‘어퍼컷’을 안긴 것은 뜻밖에도 은행이다. 수출이 줄고 채산성이 나빠지자 단번에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고 자금 일부 회수와 함께 대출이자율을 대폭 올렸다.

Y사장은 “은행이 비올 때 우산을 빼앗는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20년 이상 거래해온 나한테까지 이렇게 나올지는 몰랐다”며 “대출금리를 연 4% 선에서 졸지에 연 10% 선으로 올리니 회사 문을 닫으라는 소리 아니냐”며 하소연했다. 그는 “기준금리가 연속 하락하고 예금금리도 연 2% 밑으로 떨어졌지만 중소기업이 느끼는 대출금리는 상승일로”라고 하소연했다.

불황속 대출금리 인상으로 곤욕

요즘 중견·중소기업 중에는 경기 침체, 채산성 악화에 대瘦賻?상승(혹은 여신 회수)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한 중견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외국 기업과의 경쟁이 격화하자 생산성 향상과 연구개발 강화를 위해 최근 투자를 대폭 늘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이 회사의 K사장은 “빚을 내서 투자하니 당연히 부채비율이 올라갔다”며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거래은행은 신용등급을 단번에 하향 조정하고 연 5%인 대출금리를 연 11% 선으로 올렸다”며 억울해했다. 그는 “재무제표만 의식한다면 ‘기업가 정신’은 땅속에 파묻어 둬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어찌 보면 은행의 행동은 당연하다. 불황일수록 리스크를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지점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려고 해도 본점의 승인이 나질 않는다는 은행원들의 푸념도 들린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불황에 재무제표와 담보에만 의존해 자금을 회수하고 대출금리를 올리면 어떤 기업인들 버텨 낼 수 있겠는가.

‘관계형 금융’ 도입 검토해야

기업과 은행 간의 평행선을 좁히기 위해 이제 ‘독일식 관계형 금융(relationship banking)’의 본격 도입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됐다. 이는 재무제표 등 정량적 지표보다 기업과 오랜 거래를 통해 파악한 내용과 기술력, 기업인의 성실성 등 정성적인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대출하는 것을 뜻한다.

홍순영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독일 금융회사들은 경영난을 겪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해 기업과 은행의 공존을 모색했다”며 “재무제표에 주로 의존해온 영국 미국과는 달리 관계형 금융을 지속해온 독일 금융회사들이 우수한 실적을 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반짝 조명을 받다가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관계형 금융의 불씨를 지금부터라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기술력과 마케팅력으로 수출전선에서 뛰어온 기업인이나 도전정신이 충만한 경영자들이 용기를 갖고 뛸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 이웃집도 타버린다. 거래처를 옥죄면 결국 그 부메랑은 은행으로 되돌아올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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