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성씨학

입력 2015-08-02 18:03
롯데가(家)의 경영권 분쟁을 놓고 일본 언론은 ‘시게미쓰 일족의 난’이라는 표현을 쓴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신격호 창업자의 일본 이름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다.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시게미쓰 히로유키(重光宏之), 차남인 신동빈 회장은 시게미쓰 아키오(重光昭夫)다. 일본 롯데가 소규모 비상장기업이어서 투자자들의 관심이 적으니 기업보다 인명을 앞세울 만하다.

국내 언론은 이를 ‘형제의 난’이라고 부르며 연일 도배질이다. 대한해협을 넘나드는 음모와 가족들의 혈투, 일본에 대한 미묘한 감정까지 흥미를 더한다. 시게미쓰라는 이름은 전혀 엉뚱한 쪽에서 관심을 끌었다. 신격호 회장의 일본인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씨가 서울에 오자 일부 매체와 SNS가 ‘전범 가문’ ‘친일 기업’ 등의 비난을 퍼부었다. 그녀가 일본 외무상을 지낸 A급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와 친인척 관계라는 것이다.

롯데 측이 “하쓰코 씨의 결혼 전 성은 ‘다케모리’이며 ‘시게미쓰’라는 성은 신격호 창업자와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창씨개명 당시 영산 신씨(靈山 辛氏) 집안이 시게미쓰(重光)를 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 여성은 서양처럼 결혼 후 남편 봉?따른다. 롯데가의 부인과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전범 시게미쓰 가문의 딸이라고 헛발질을 하게 된다.

같은 동양문화권인데도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성은 변하지 않는다. 성은 부계혈통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에 결혼 등으로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겨도 바꾸지 않는다. 일본은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姓)이 없고, 가계를 표시하는 씨(氏)만 있었다. 게다가 서민들이 성을 가진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구조사 과정에서 이름을 급조하다 보니 자신이 사는 장소의 지형물을 따서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13만개가 넘는다는 일본 성씨 중 95% 이상이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조상의 거주지를 딴 성씨는 서양 문화권에서도 흔한 일이다. 영화감독 스필버그(Spielberg)는 ‘기쁨의 동산’, 대서양 첫 횡단비행자 린드버그(Lindberg)는 ‘보리나무 산’이란 의미라고 한다. 중세 유럽 귀족들도 자신의 영지를 가문의 성씨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de’, 독일의 ‘von’, 이탈리아의 ‘di’ 등이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다. 귀족 신분을 사칭하려 ‘de’를 넣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성씨에 얽힌 오해와 해프닝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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