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내시'는 북방 초원 유목문화에서 비롯됐다

입력 2015-07-30 19:00
유라시아 역사 기행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332쪽 / 1만8000원


[ 김보영 기자 ] 일본 고고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3~1983)는 중졸 학력으로 교토대 박물관 자원봉사자로 일하다가 같은 대학 고고학과 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공의 발판이 된 것은 동아시아 고대문화 연구실적이다. 한국과 중국 등을 돌아다니며 방대한 자료를 모은 데다 유물 실측 능력과 한문 해독력까지 갖춰 유럽 고고학계에서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 고고학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러시아 유학 시절 내놓은 이론이 ‘한국 문화 북방기원설’이다. 한민족의 기원이 북방 초원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청동기 유물에 스키타이 계통의 문화가 녹아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우메하라가 워낙 ‘스타 고고학자’였던 탓에 이 설에는 크게 힘이 실렸다. 오늘날 역사에 크게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한민족의 기원’ 하면 시베리아 남서부 지역인 알타이와 바이칼호수 등을 떠올리게 된 시초다. 한국어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점도 조상이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장면과 겹쳐지는 듯하다.

북방기원설은 사실 재고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다. 유라시아 초원 역사에 천착한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한국과 유라시아 초원 사이에 꾸준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연결짓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북방기원설을 논할 때 양 극단의 모습을 보인다. 신라나 가야 지배층이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일 것으로 ‘단정’하거나 북방기원설을 우메하라로 인해 촉발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로 치부해 ‘무시’하는 태도다.

강 교수가 ‘있는 그대로의’ 북방 초원을 알리기 위해 《유라시아 역사 기행》을 쓰게 된 배경이다. 초원의 겨울은 길고, 일교차도 커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초원은 일제가 미화한 것처럼 낭만적인 공간도, 서구에서 묘사한 것처럼 야만적인 공간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척박한 환경을 딛고 전차와 미라 보존법 등의 기술을 발달시킨 북방 유라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며 초원에 대한 편견을 깬다.

예컨대 유목민의 민족성이 정착민에 비해 잔인하다는 편견이 대표적이다. 스키타이 전사들이 적을 죽였을 때 머리 가죽을 벗긴 것은 편의성에 따른 것이었다. 적의 신체 일부를 지니고 다니며 용맹을 과시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원의 전사들이 목을 베는 대신 머리 가죽을 벗겼던 것은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의 입장에서 머리 전체보다는 가죽이 지니고 다니기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생식 기능을 잃은 ‘내시’라는 직업군이 등장한 것도 초원 문화와 영향이 깊다. 등자나 안장 없이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유목민의 특성상 사고로 생식 기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식 기능의 저하를 겁내지 않도록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 내시의 시초가 됐다는 해석이 흥미롭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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