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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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원과 향약의 나라 조선
(27) 이순신, 일본군의 기세를 꺾다
(28) 광해군의 두 얼굴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흔히들 1층 상설 전시실에서 관람을 많이 하는데, 도착하자마자 3층 조각, 공예관으로 향했습니다. 이번호에서 여러분에게 조선 전기 자기 공예의 정수인 분청사기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머릿속에 고정관념처럼 도식화된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의 관념도 한 번 깨볼까 합니다.
고려 백자, 조선 청자 그리고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 즉 16세기까지 유행하였던 자기입니다. 그런데 왜 사기라고 할까요? 자기가 곧 사기그릇입니다. 둘 다 같은 뜻이지요. 청사기, 즉 청색 계통의 자기에 흰 흙을 7가지 방식으로 장식한 그릇이 분청사기입니다. 마치 여성이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는 것에 착안하여 ‘분장회청사기’라고 명명된 것을 줄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분청자’라고 해도 되겠네요?
네. 맞습니다. 청자를 만드는 흙과 분청사기의 흙은 같은 성분이니까요. 분청사기의 흙이 질적으로 조금 떨어지기는 합니다. 결국 분청사기라고 하여 청자나 백자와 전혀 다르거나 갑자기 튀어나온 발명품은 아닙니다. 역사가 연속성을 가지듯 예술도 연속성을 가지며 동시에 기존 상황을 극복하면서 새 예술품이 탄생하게 되니까요.
분청사기는 전국적으로 생산되었으며, 수요자도 왕실부터 일반 백성까지 매우 폭이 넓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필수품이자 애용품이었던 것이지요.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전라도 부안이나 강진 등 기존 청자를 생산하던 곳이 크게 훼손되면서 도공들은 이를 피해 내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결과 15세기에는 전국 각 군에서 자기가 제작되었으며 여기에 백토를 입히는 다양한 예술적 기법이 더해지면서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의 일상용품이자 예술품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아, 혹여라도 너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여러분을 위해 말씀드리면 이미 고려시대에 청자를 만들던 곳에서 소량의 백자를 꾸준히 만들었으며, 조선에서는 거꾸로 17세기까지 청자를 제작했습니다. 고려 백자, 조선 청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자유분방·단순한 문양의 독창적 美
조선 전기, 특히 세종 대는 누구나 인정하듯 정치적 치세를 바탕으로 민족 문화가 발달한 시기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당시 도공들도 치밀한 완성도보다는 좀 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자유로운 양식을 창출해냅니다. 붓으로 빠르 ?힘차게 바르는 기법인 ‘귀얄’ 방식으로 완성된 <분청사기 귀얄문 병>을 봅시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백자만 보다 이 병을 보면 만들다 만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도공이 자연스러운 필치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했다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새겨졌다고도 볼 수 있지요. 조각칼로 매우 단순화시킨 문양을 새기는 ‘조화’ 기법을 활용한 국보 제178호 <분청사기 조화 어문 편병>을 한번 볼까요? 몸체 양쪽 면을 최대한 납작하게 만들어 물고기 두 마리를 시원하게 새겨놓았는데요. 아직 조각칼에 서툰 아이가 새긴 것 같지만 매우 현대적인 조형미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여기 새겨진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으므로 다산을 상징하거나 뜬 눈으로 잠을 자는 습성에 착안해 과거급제를 위해 공부하거나 불교의 해탈을 위한 수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세종과 세조 대에 유행하였던 기법으로 도장을 활용하여 그릇 전체에 눌러 찍음으로써 같은 문양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인화’ 방식이 있습니다. <분청사기 인화문 발>을 보면 동일한 무늬가 패턴화되어 나타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고려 상감 청자와의 연속성을 확인하면서도 개성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분청사기 상감어문 매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매병의 모습을 하면서도 동심원 속에 서로 반대 방향의 물고기 두 마리와 그 주변에 인화 방식으로 새긴 동심원과 학을 꾸며놓았습니다. 분청사기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청자에서 좀 더 예술적 기법이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과도기 형태이지요.
덤벙 기법 등 다양한 실험정신 발휘
<분청사기 철화어문 병>은 앞에서 언급한 붓자국이 남아 있는 귀얄 위에 산화철로 물고기 등을 그려 또 다른 시각적 효과를 자아낸 작품입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유행한 것으로 보는 이 방식은 시원한 붓질과 추상적 그림이 어우러지는 표현을 드러내고 있지요. 결국 분청사기의 힘은 자유분방함과 다양한 실험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자와 백자만 알고 있었다면 우리 도자기의 또 다른 예술적 면모를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조선의 백자를 빼고 분청사기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명에서 백자, 특히 청화백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분청사기는 서서히 내리막길로 가게 됩니다. 당연히 왕실에서 백자를 선호하였기 때문이지요. 도공들은 분청사기를 백자처럼 보이도록 말 그대로 백토물에 ‘덤벙’ 담궈 보기도 하여 일명 ‘덤벙’ 기법의 분청사기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부시게 하얀 백자에 코발트 안료로 칠한 청색의 멋진 청화백자의 등장으로 이제 분청사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신 현대인의 마음 속에 자유롭고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15세기, 조선의 얼굴 바로 분청사기였습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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