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세계유산 등재 산업시설 '조선인 강제노역' 인정

입력 2015-07-05 22:41
수정 2015-07-06 08:05
"한국인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징용 당했다"
세계유산위, 23곳 등재…정부 "우리 입장 관철"


[ 전예진 기자 ]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근대 산업시설에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반영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과거사 왜곡을 일삼았던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다. 경색된 한·일 관계가 풀리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5일 일본이 신청한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다. 한국과 일본은 23개 시설 가운데 조선인 강제노역이 있었던 7개 시설에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다퉜지만 막판에 극적 합의를 도출했다. 한·일 두 나라를 포함한 전체 21개 세계유산위원국의 만장일치로 등재안이 통과됐다.

일본 정부 대표단은 이날 등재 결정 직전 위원국을 상대로 한 발언에서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용정책을 시행했으며 1940년대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아래 강제로 노역했다”며 “일본은 이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준비?돼 있다”고 발표했다. 또 “일본은 정보센터 설치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강제노역을 공식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측의 발언이 끝난 뒤 한국 정부 대표인 조태열 외교부 차관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에 동참하겠다”고 답했다. 일본 산업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발표에 대해 “우리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히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강제징용을 인정한 것뿐만 아니라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해당 시설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의 유산이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는 상관이 없다고 설명해왔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역사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위원회도 일본 측에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반영하라”고 권고하고 한·일 협의를 통해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양국은 외교 경로를 통해 여러 차례 이 문제를 논의해왔다. 그러나 전날까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 특히 강제노역 사실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일본과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4일 예정됐던 등재 결정이 하루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이번에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결국 한국 입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인간 존엄성과 인권 문제라는 점을 들어 회원국을 설득한 게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전방위적 외교노력이 이뤄낸 값진 성과”라며 “최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과 관련된 긍정적 움직임에 더해 이번 문제가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된 것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해나갈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선인의 강제노역은 일본 정부 대표단의 발언록과 등재 결정문에 주석(註釋·footnote) 형식으로 포함됐다. 일본은 2017년 12월까지 세계유산위원회에 후속 조치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