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포로생활 47년, 죽는 날까지 증언할 것"

입력 2015-06-24 21:11
수정 2015-06-25 09:45
유영복 귀환국군용사회장이 맞는 '65주년 6·25'

인민군 징집, 탈출, 국군 입대
김화지구 전투서 포로로 잡혀

北 '불량분자' 낙인, 강제 노역
8만여명 국군포로 기억됐으면


[ 이미아 기자 ] “잊혀지기 싫었습니다. 국군포로로 지낸 세월을 떠올리는 건 너무 고통스럽지만 죽는 날까지 증언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유영복 귀환국군용사회 회장(85·사진)은 최근 경기 이천시 관고동 자택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국군포로는 조국을 위해 맹렬히 싸우다 포로가 된 용사들”이라며 “이제라도 명예롭게 기억되길 간절히 원한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의 삶엔 6·25전쟁의 비극적 역사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열일곱 살 때 서울로 이사 왔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동생이 네 명이나 됐지만 야간 중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가족과 단란하게 지냈다. 그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평범했던 일상은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며 산산조각 났다. 유 회장은 북한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해 국군이 됐다. 하지만 1953년 강원 김화지구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납과 아연 생산지로 유명한 함경남도 검덕광산에서 광산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깊이 1㎞ 지하까지 내려가 길이 10㎞가 넘는 갱도를 거쳐야 작업장이 나왔다”며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광산에서 먹고 자는 날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또 “광산에서 ‘사고가 났다’는 건 사람이 몇 명 죽었단 뜻”이라며 “내가 일하던 작업장 근처 다른 광산에선 한날한시에 스무 명이 넘는 광부가 죽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산 노동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만성 폐·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다.

유 회장은 “북한에선 ‘여기 남은 군인들은 본인이 원해서 남은 것이지 포로가 아니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며 “1956년엔 아예 공민증을 내줘서 눌러앉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 “나를 비롯해 8만명이 넘는 국군포로가 만 60세가 될 때까지 검덕광산, 아오지탄광 등 광산지대에서 강제노역을 했다”며 “북에서 전쟁 후 모자란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국군포로를 동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 소식이 알려졌을 때 국군포로들은 환호했다”고 유 회장은 말했다. 하지만 희망은 곧 깊은 절망으로 변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엔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 회장은 2000년 7월 나이 일흔에 중국인 보따리장수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북에서 탈출했다. 유 회장은 한국에 와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부친은 그와 재회한 지 6개월 만에 별세했다.

2005년 자서전 ‘운명의 두날’을 펴내고, 2013년 귀환국군용사회를 조직한 유 회장은 최근 국군포로의 실상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북한을 탈출해 온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은 비록 국가유공자 대접은 받고 있지만 가슴이 쓰라리다”며 “이제 대부분 80·90대 고령인 데다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많이 괴로워한다”고 전했다.

“나는 무식해서 정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내가 살아온 대로 말할 뿐”이라는 유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북에서는 ‘불량분자’로 낙인찍히고, 한국에선 대부분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돼 서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부가 국군포로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6·25전쟁은 휴전됐을 뿐 끝난 전쟁이 아니에요. 나라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잊으면 누가 앞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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