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낡은 규제에 갇힌 자본시장
저성장·고령화란 도전에 대응 못해
최소 규제·경쟁체제에 초점 맞춰야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
항상 웃는 모습으로 다니던 우리 동네 멋쟁이 할머니 얼굴이 왠지 어두워졌다. 아껴 모은 금쪽 같은 돈을 많이 불려주겠다고 해서 모 금융회사에 맡겼는데 원금이 20%나 잠식됐다고 한다. 젊은 세대처럼 노후 자금을 펀드에 투자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기에 실망도 컸나 보다. 장시간 설명을 듣긴 했지만 대부분이 수익성에 대한 것이었다는 할머니는 어쨌거나 이해를 했다고 여기저기 서명을 했으니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금융사 직원에게 당한 기분이라 더 화가 난다는 것이다.
금융사 주변에서 이런 유의 일은 한두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지적돼 왔던 불완전판매 사례 중 하나로 치부하기엔 한국 금융의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이 할머니처럼 상대적으로 금융자산이 많은 고령층은 저금리 추세를 견디다 못해 이름조차 생소한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를 늘려 가고 있다. 저금리·저성장·고령화 특징이 뚜렷한 한국 경제에서 자본시장은 은행을 대신해 모험자본을 공급하고 노후소득을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달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금융업계와 정부의 공감대가 형성돼 2009년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지속적인 고용 창출이 필요하고 복지 수요도 많은 한국 경제는 당면 과제로서 차세대 성장 산업을 육성해야 했고, 기술혁신과 함께 자본을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예상됐던 많은 변화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다양하고 혁신적인 금융상품 개발이 가능해졌지만 잇따른 금융사고로 금융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국내 금융투자회사의 국제화도 큰 진전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오락가락 과도한 규제 탓에 외국 금융사마저 한국을 떠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시작한 ‘4대 개혁’의 하나로 금융 개혁이 논의되고 있고 금융위원장도 금융 개혁의 핵심으로 자본시장 개혁을 꼽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지만으로 은행 주도로 자금을 공급하던 개발경제시대의 규제체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주요 선진국의 경우 자본시장의 금융사들은 진입과 퇴출이 비교적 자유롭고, 건전성이나 자산운용 규제 수준이 한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반면에 불완전판매 규제 등 투자자 보호 규제 수준은 매우 높여 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기술금융 부문도 그렇다. 상대적으로 안전성이 높은 자금은 은행으로, 고수익·고위험 자금은 자본시장으로 성향에 따라 모여 실물 경제에 공급되는 것이 금융의 속성이다. 금융위가 은행 혁신성 평가에 기술금융 실적을 반영해 기술금융 실적이 저조한 은행에 불이익을 주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자본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금융위원장이 밝혔듯이 자본시장 활성화의 물꼬는 2014년 9월 말 현재 1263조원에 달하는 연기금 등 국가 금융자산의 운용에 있다. 아직도 상대적으로 젊은 국민연금의 경우 먼 훗날 고갈될 것이라는 위기감만 조장하지 말고 당장 활용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자본시장 발전에 역할을 해야 할 연기금들이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 사학연금은 교육부 등 각 부처로 나뉘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저성장·고령화 시대에는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효율성을 높여서 각자 금융자산으로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도록 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 자본시장이 고급 일자리를 만들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가장 적은 규제가 자본시장 최선의 규제’란 원칙하에 공정한 거래와 경쟁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저금리 기조에도 불구하고 고령화 사회는 금융자산에 대한 수요를 늘려 갈 것이다. 규제 개혁을 통해 자본시장을 거듭나게 해야 하는 이유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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