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가톨릭 성지를 가다 (중)
탄생 500주년 현수막 펄럭
신발 벗는 것은 욕망 벗는 것…'맨발'의 고행 있어야 목표 도달
[ 고재연 기자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85㎞ 떨어진 아빌라. 개혁적인 수도원인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한 성녀 대(大)데레사(1515~1582)의 도시다. 로마식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 곳곳에 지난 8일 그의 얼굴과 함께 ‘Ⅴ Centenario Santa Teresa 2015(성녀 데레사 탄생 500주년)’라고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데레사는 1515년 3월28일 아빌라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세 때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회 강생수녀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귀족화된 수도원의 모습에 실망했다. 기부금을 내고 수도자가 된 이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귀족 자녀들은 하녀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올 정도였다.
1562년 데레사는 수도원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엄격한 수도생활을 강조하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했다. 한겨울에도 샌들만 신고 다닌 데서 ‘맨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과 함께 스페인 전역에 남녀 수도원 17곳을 세웠다.
당시 데레사 수녀가 머물렀던 아빌라 강생수녀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번 들어가면 평생 바깥 세상과의 교류가 차단되는 봉쇄수도원이다. 수녀원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실내에 쇠창살이 쳐진 창문 사이로 한 줄기 빛만이 들어왔다.
수도원의 한쪽 벽에는 예수가 기둥에 묶여 매맞는 장면을 바라보는 데레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데레사의 환시(幻視)를 그린 그림인데, 이 환시 경험은 데레사에게 ‘회심’의 계기가 됐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수도원 개혁 의지는 더 커졌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다. 1575년부터 가르멜회 내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 분쟁이 시작됐다. 맨발의 가르멜회에 대한 온갖 박해가 시작됐다. 강생수녀원의 55명이 파문당했다. 데레사 수녀는 그러나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나이다”라며 극기수덕(克己修德)의 길을 고집했다. 마침내 1579년 교황은 맨발의 가르멜회를 가르멜회에서 분리해 독립 수도회로 인정했다.
아빌라 강생수녀원에서 나와 차를 타고 20분, 살라망카에서 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알바 데 토르메스로 향했다. 알바 데 토르메스의 가르멜수녀원은 데레사 수녀가 만든 여덟 번째 수녀원이자 그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그는 1582년 부르고스에 마지막 가르멜수녀원을 만든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서 숨 ?거뒀다. 그의 무덤에는 신비로운 꽃향기가 맴돌았다. 살라망카대 교수들이 이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무덤을 열자 그의 유해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수녀원 한쪽에 공개된 쪼그라든 데레사 수녀의 심장과 오른팔이 그 전설을 입증하고 있다.
‘여성도 도덕적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존재하고, 마녀사냥이 횡행했던 중세 사회에서 데레사는 수도원 변화에 앞장선 개혁 전사였다. 그 ‘맨발’의 개혁이 현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데레사의 생가에서 만난 다니엘 데 파블로 마로토 맨발의 가르멜회 신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에는 세속의 다양한 욕구를 떨쳐버려야 개혁도 가능하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수도자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상생활 안에서도 우리는 늘 고행을 하고 있지요. 맨발은 결국 운동선수가 목표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듯, 목표만 세워놓고 상응하는 희생과 고행이 없으면 절대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빌라=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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