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전격 연기됐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방미를 불과 나흘 앞둔 어제 “메르스 조기 종식 등 국민안전을 챙기기 위해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매우 부적절한 판단으로, 실망스러운 결정이다.
청와대는 국민안전이 최우선이기에 방미를 연기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무엇이 궁극적인 국민의 안전 문제인지 돌아봐야 한다. 갈수록 도발 수위가 높아지는 북한의 핵위협, 극에 달한 김정은식 공포정치와 불안한 북 내부의 분위기, 팽창적인 일본과 미·일의 신밀월 관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우리의 입장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게 지금 한반도 주변 상황이다. 엔저 속에서 원화의 고립화로 환율이 우리 경제에 심각한 압박요인이 된 것도 외교전에서 밀린 결과다. 대통령의 이번 방미는 이런 중대한 국정 현안들을 풀어야 할 긴급성을 안고 있었다.
청와대가 ‘중동감기’와 관련한 여론동향을 단단히 의식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국정순위가 시시각각 변하는 여론조사에 따라 결정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지극히 선정적인 보도들이 쏟아지고 그에 따라 대중 심리가 흔들려 정부가 국민의 과민반응을 자제토록 당부하고 있다. 청와대가 오히려 중동감기에 과민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대응 부실을 공격하는 정치적 공세에 위축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광기의 ‘광우병 촛불집회’에 더럭 겁부터 먹고 뒷동산에 올랐던 청와대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표방한 미국과 수개월 전부터 일정과 의제를 협의해 준비해온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실현됐으면 다소 껄끄러워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인 양국관계 개선은 물론 동북아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가져왔을 것이다. 국정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누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과업의 분담도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이 있고, 장관이 할 일이 있다. 정상회담은 정상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정상외교가 독감 대응에 밀려버렸다. 청와대가 생각하는 국정 순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이제 대형 교통사고라도 나면 대통령이 현장에 나가 신호조작을 지휘해야 할 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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