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 기자의 생생헬스 - 인류의 바이러스 투쟁
무분별한 개발로 생태계 파괴…20세기 후반 바이러스 잇따라
중세 유럽 공포로 몰아 넣은 흑사병·콜레라 원인 박테리아
최근엔 사스·HIV·AI 등 변이 쉬운 RNA 바이러스 창궐
숙주에 해 끼치지 않는 백신도…우두 바이러스로 천연두 퇴치
[ 이준혁 기자 ]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창궐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으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공포에 휩싸였다. 아직 정확한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백신도 개발되지 않았다. 지난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사망자를 낸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수습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각국 보건당국은 메르스 확산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급기야 유엔은 조심스럽게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유엔이 2011년 선언했던 ‘바이러스 등 세균전과의 종식’이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해온 바이러스가 변종이나 신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지만 통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인류 역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근 30년 사이 창궐한 신종 바이러스는 에볼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조류 인플루엔자(AI),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신종플루,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일명 살인진드기 바이러스), 메르스 등 30여종이 넘는다.
일각에선 무분별한 개발과 지구 온난화 등 생태계 균형 파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김형규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내과)는 “바이러스 창궐은 근본적으로 20세기 후반에 이뤄진 과도한 개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며 “문명과 교통의 발달로 바이러스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인간의 대응체계도 함께 발전했는데, 이 균형이 깨지면서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전염병이라고 하면 ‘나쁜 균’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염병의 원인은 두 종류다. 세균(박테리아) 아니면 바이러스다. 중세 유럽인을 몰살시킨 페스트(흑사병)는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가, 영국 런던을 공포의 도시로 만들었던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 박테리아가 일으켰다. 21세기 전염병은 바이러스가 주도하고 있다. 2003년 9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스를 비롯해 HIV, AI 등은 모두 바이러스다.
바이러스의 두 얼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둘 다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유전물질을 갖고 있고, 매우 작은 ‘미생물’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크기가 박테리아의 50분의 1에서 10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세균 여과기에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광학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아 반드시 전자현미경을 이용해야 한다.
구조도 바이러스가 더 간단하다. 엄중식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박테리아는 핵과 인지질(지방질), 세포 소기관이 있는 반면 바이러스는 유전물질인 핵산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이 전부”라며 “박테리아가 노트북이라면 바이러스는 컴퓨터 본체 없이 메모리칩만 있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혼자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하지만 일단 컴퓨터에 장착되면 기억된 정보를 쏟아내는 메모리칩처럼, 바이러스는 숙주 없이는 무생물과 다름없다. 일단 숙주에 정착하면 쉽게 증식하는 특징이 있다. 엄 교수는 “박테리아는 완전한 생명체로 보지만 바이러스는 무생물과 생물의 중간 단계로 본다”며 “구조가 단순하다 보니 핵산의 구성염기들이 조금만 위치를 바꿔도 바이러스의 특성 자체가 변할 수 있어 변종이 쉽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바이러스 중에는 인간을 비롯한 특정한 숙주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메르스(박쥐·낙타), 에볼라(과일박쥐), AI(가금류) 등이 모두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이다.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반드시 ‘독’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식물에 공생하는 바이러스 중 숙주에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경우도 많다. 소의 전염병(우두) 바이러스를 이용한 백신 덕분에 인류는 오랜 적이었던 천연두를 퇴치할 수 있었다. 최근엔 바이러스를 전달체로 이용하는 유전자 치료법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송대섭 고려대 약학과 교수는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바이러스는 인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며 “바이러스는 기본적으로 어느 시기가 되면 변형이 되고 전염력이 떨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공포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돌연변이 쉬운 RNA 바이러스
2013년 ‘살인 진드기’ 공포를 몰고 온 SFTS, 지난해 아프리카를 비롯해 전 세계를 뒤흔든 에볼라 그리고 국내에 확산 중인 메르스. 최근 3년간 국제적으로 창궐한 바이러스들은 생물학적으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유전정보가 리보핵산(RNA)으로 이뤄진 RNA 바이러스라는 점이다. 지난해 국내 축산업계를 긴장 상태로 몰고 갔던 AI도 RNA 바이러스다. RNA 바이러스의 가장 큰 특징은 체내에 침투한 뒤 바이러스를 늘리기 위해 유전정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잘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재열 경북대 생명공학부 교수는 “DNA로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DNA 바이러스에 비해 RNA 바이러스는 유전정보를 한 번 복제할 때 돌연변이가 일어날 확률이 1000배 이상 높다”고 설명했다. 메르스가 중동에 비해 국내에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을 보이는 데 대해 바이러스 변이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메르스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는 것은 현재의 숙주에서 벗어나 재빨리 다른 숙주에게로 옮겨가기 위한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이다. 엄 교수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가장 좋은 방역법은 감염 의심자들을 신속하게 검사하고 격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움말=김형규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엄중식 한림대 강동성 늉?감염내과 교수, 송대섭 고려대 약학과 교수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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