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돌파] 러시아 통관시장 뚫은 첫 한국인…신뢰로 '뒷돈 관행'도 바꿔

입력 2015-06-05 21:06
해외서 꽃피우는 기업가 정신
(7) 중기의 러 진출 조력자 - 권순건 알파루스 사장

한 컨테이너에 여러 회사 제품 담아…'소량 수출' 중기 맞춤형 서비스 강점
세관신고서 작성·화물 검사 등 전단계 위기대응 메뉴얼 만들어
비빔밥 등 한식 도시락 들고 세관 문턱 닳도록 드나들며 신뢰 쌓아
"어려울 땐 직원들이 가장 큰 힘"


[ 김은정 기자 ]
권순건 알파루스 사장(39)의 20대 시절은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대학 졸업장 외엔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다. 취업도 어려워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배짱은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 내 자리 한 곳 없겠나’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된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 배짱으로 2003년 러시아로 건너갔고 12년 만에 연매출 1000만달러(약 110억원) 규모의 통관업체를 일궈냈다. 그것도 뒷돈과 인맥으로 얽히고설켜 외국인에게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러시아 통관시장에서 말이다.

러시아 통관 대행시장 개척

권 사장이 2008년 러시아에 설립한 알파루스는 운송 및 통관 대행 회사다. 수출 화물을 모스크바로 운송하고 수입 통관 절차를 밟아준다. 통관이 끝나면 러시아 전역으로 물건을 배송한다. 알파루스는 한국 중소기업의 러시아 수출 물량을 거의 도맡고 있다.

알파루스의 최대 경쟁력은 ‘콘솔 서비스’다. 콘솔이란 통합·합병을 의미하는 콘솔리데이션(consolidation)의 앞글자를 딴 업계 용어다. 한 컨테이너에 한 회사 제품만 싣는 게 아니라 이 회사 저 회사의 여러 제품을 모아 운송하는 서비스다. 소량 수출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다.

러시아 주재원으로 일하던 권 사장은 러시아행 소량 화물 운송시장의 가능성을 봤다. 러시아는 인구 약 1억4200만명(세계 9위), 국토 면적 1700만㎢(1위)인 대국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자원도 풍부하다. 권 사장은 이 시장을 보고 진출하는 한국 중소기업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1992년 1억9000만달러로 시작한 한국과 러시아의 교역량은 20년간 100배가 늘었다.

누군가는 러시아와의 교역 통로를 관리해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시장을 놓고도 창업을 시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마침 러시아 업체들이 한국 중소기업을 위한 콘솔 서비스에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는 미련 없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피해 입은 한국 기업 보고 창업 결심

권 사장과 러시아의 인연은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시작됐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러시아어과에 진학했다. 졸업을 蘭寬?일자리를 찾다가 중소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전공 덕분에 입사하자마자 러시아 주재 직원으로 발령이 났다.

창업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7년 현지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이모씨를 만났다. 이씨는 한국에서 전자부품 제조 기업을 운영했다고 했다. 그러다 러시아 통관 과정에서 수출품이 담긴 컨테이너 한 개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재기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이씨는 한국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수년째 러시아에서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 ‘한국 중소기업들이 안심하고 러시아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통관을 대신해 주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문제는 시장의 관행이었다. 2000년대 러시아에선 ‘뒷돈 통관’이 일반적이었다. 통관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물품이나 서류를 제대로 갖춰도 담당자들이 통관 기간을 일부러 지연시키기도 했다. 품목에 상관없이 컨테이너 한 개에 얼마씩 뒷돈을 받기 일쑤였다. 영세 수출 중소기업엔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기존 통관 대행업체는 대기업 일만 맡으려 했다. 중소기업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래저래 중소기업들에 러시아 통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출 장벽이었다.

7년 만에 한국 中企 절반을 고객으로

권 사장은 뒷돈 관행부터 바꿨다. 뒷돈을 주지 않아도 통관에 문제가 없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통관 매뉴얼을 만들었다. 단순히 통관 절차를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세관 신고서 작성과 국경 검사대의 화물 검사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醍?변수와 사례를 수집했다. 화물 운송 전 준비 단계부터 서류를 보강할 때 주의해야 할 점, 검사대에 별도의 설명을 할 때 강조해야 하는 점 등을 모두 챙겨 매뉴얼화했다.

러시아 세관 담당자들도 꼼꼼히 관리했다. 권 사장은 “담당자들과 반복적으로 갈등하고 싸우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유대감과 신뢰, 친밀감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친밀감엔 ‘한식’이 주효했다. 세관을 출입할 때마다 비빔밥 등을 현지화한 도시락을 준비해 제공했다. 세관원들은 정성으로 대하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해다. 권 사장은 “‘음식 끝에 정 난다’는 한국식 정서가 러시아에서도 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 수출기업 사이에서 ‘알파루스는 뒷돈보다 완벽한 일 처리를 추구한다’는 입소문이 났다. 더 하면 더 했지 작은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신뢰가 쌓이자 사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사업이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단순 제조업도 아니고 러시아인을 상대로 하는 통관 대행을 외국인이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많았다. 초기 자본을 마련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한번은 음료업체의 통관 대행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음료수를 사면 사은품으로 컵을 주는 일이 흔했다. 사은품 컵이 붙어있는 음료수를 컨테이너에 가득 담아 모스크바로 옮겼다. 러시아 세관에서는 이를 ‘밀수’라고 했다. 신고 서류에 있는 물품과 실제 물품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컨테이너가 압수됐고 이를 되찾는 데 자본금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가장 힘이 된 건 직원들이었다. “투자금을 모두 날린 직후였어요. 돈이 없어서 직원들 월급도 못 줄 판이었죠. 당시 미혼이었던 한 여직원이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만두려나 싶었죠. 그런데 결혼자금으로 모은 것이라며 1000만원이 찍혀 있는 통장을 내미는 겁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 절반을 고객사로 확보했다. 그러나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현지 업체들의 공세도 만만찮다. 권 사장은 “적은 물량을 맡겼던 기업들이 컨테이너 몇 개를 쓰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며 “한국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해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까지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