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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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의 어린 나이에 몽골이 통치하던 중국 원나라 궁궐에 생활하기 시작하여 10년 뒤에야 고국에 돌아와 왕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원하지도 않던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머리도 몽골의 변발을 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그는 이러한 원의 속박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무려 100년간이나 원나라가 차지하고 화주(함남 영흥) 이북의 땅을 곧 탈환하기 위한 공격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이는 성공하여 원이 통치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고려의 옛 땅을 되찾게 됩니다. 세계 제일의 최강국 원에 반격을 가한 왕, 그가 바로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입니다.
변발을 풀어버린 공민왕
공민왕의 이름을 잘 살펴보면 당 쳄?정치적 상황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공민왕은 앞선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보이는 ‘충’자 시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 ‘충’자는 원에 대한 충성의 의미가 강하지요. 그런데 공민왕은 그 ‘충’자를 쓰지 않았으니 여러분도 그가 원에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공민’이라는 시호는 고려 자체에서 추증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반원 개혁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가 원·명 교체기라는 외부적 요인도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공민왕이 즉위한 1351년 중국에서는 한족 중심으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 상황이었지요. 공민왕은 즉위한 다음 해에 곧 과감하게 몽골의 풍속을 폐지합니다. 당시 대신 이연종이 변발과 호복이 고려의 제도가 아니므로 본받지 말 것을 건의하자 기다렸다는 듯 공민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립니다. 물론 이를 건의한 이연종에게는 옷과 요를 하사했지요.
기철로 대변되는 친원파 세력을 치다
한번 마음을 먹은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개혁 정치를 거침없이 추진해 갑니다. 몽골이 일본 정벌을 구실로 설치한 후 실제로는 고려의 내정간섭을 자행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원나라 연호를 거부하였으며 고려의 원래 통치제도였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중심의 2성 6부 체제를 복귀합니다. 이는 곧 고려가 원의 속국이 아니라 그들과 대등한 국가라는 대내외적 선포이기도 했지요. 이런 반원 정책의 정점은 앞서 언급한 쌍성총관부 탈환, 그리고 기철로 대변되는 친원파 세력에 대한 과감한 숙청이었습니다. 공녀로 원에 끌려갔다가 원나라 황제인 순제의 황비가 된 누이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철은 권력을 빙자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합니다. 공민왕은 거짓 잔치를 열고 기철 등 친원파 핵심 세력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곧 그들을 궁궐 안에서 제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민왕의 반원 정치와 왕권 강화가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은 않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던 친원 세력이 반발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외우내환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한때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처음에는 원치 않았던 노국공주와의 결혼이었지만 공민왕은 그녀를 매우 많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노국공주가 그만 난산으로 사망하면서 공민왕은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신돈의 등장, 그리고 공민왕의 좌절
이때 공민왕이 믿고 국사를 맡기게 되는 인물이 승려 신돈입니다. 그는 왕으로부터 개혁 정책을 위임받아 주로 친원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에 맞서게 됩니다. 한편에는 공민왕이 성리학적 통치를 위해 등용하였던 이색 등 신진 사대부가 있었지만 전적으로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은 승려 신돈이었습니다. 그는 권문세족 등 당대 권력층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찾아내 원래대로 되돌리는 개혁을 추진합니다.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통해 신돈이 추진한 이 개혁은 당시 백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만 기존 권문세족의 거센 반발과 신돈 스스가 권력에 도취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기존 권력층은 신돈이 왕위를 넘본다고 모함하였으며 공민왕도 권력화돼 가던 신돈을 그대로 놔둘 수 없게 되자 그를 숙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민왕 스스로 개혁의 한 축을 잘라 버린 형국이 되었으며, 신진 사대부들이 개혁의 밑거름으로 성장하였으나 공민왕이 예전만큼 강한 개혁 정치를 추진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틈을 노린 일부 측근 세력과 권력층의 결탁으로 1371년 공민왕은 그만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제 고려는 내부 기득권 세력의 부정 부패를 물리치고,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맞춰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빠져듭니다.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어떤 국가를 선택하게 될까요? 이는 다음호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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