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빅데이터와 붉은 깃발 조례

입력 2015-05-26 20:35
빅데이터 수집·활용 막는 조치들
독일·영국 차산업 운명 가른 규제처럼
융합 통한 혁신의 싹 밟을까 우려

윤창현 < 서울시립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3344@daum.net >


영국에서는 한때 ‘붉은 깃발 조례(Red Flag Act)’라는 독특한 법이 시행된 적이 있다. 마차 시대에서 자동차 시대로 넘어가던 시절의 일이다. 자동차 사고로 인해 저명한 천문학자가 사망하는 등 사건이 터지자 마차와 기차 관련 업자들의 치열한 로비가 이뤄졌고 마침내 이 조치가 탄생했다.

이 조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자동차 운행 속도를 시속 6㎞ 정도로 제한하는 부분과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자동차를 앞서 가면서 깃발을 흔들어 자동차가 지나간다는 것을 알리도록 한 부분이다. 속도를 내기 위해 만든 자동차를 마차 이하의 속도로 움직이게 규제했으니 한마디로 ‘자동차의 마차화’라 부를 만한 조치다. ‘자동차의 횡포와 위험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셈인데 숨은 목적은 마차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모를 사람은 없다.

‘붉은 깃발 조례’에 투영된 영국의 모습은 속도 제한이 愎?아우토반을 건설한 독일과 비교된다. 지금 독일에는 벤츠, BMW, 폭스바겐이 있지만 영국의 자동차산업 기반은 거의 무너진 상태다.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산업 등장 초기에 자동차 부문을 위축시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자동차의 등장은 정말 중요한 혁신이었는데 영국은 이를 간파하지 못한 채 좋은 기회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 금융 분야와 연결해 다양한 혁신의 씨앗들이 제시되고 있다. 혁신의 화두는 ‘모바일’ ‘소셜’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크라우드펀딩’ ‘핀테크(금융+기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빅데이터는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보험 가입자들이 몸에 센서를 부착하면 이들의 건강 상태, 운동 여부 등과 관련한 각종 데이터가 보험회사로 전송되고 이런 빅데이터가 회사에 축적된다. 회사는 빅데이터를 분석, 개인별로 상황을 체크해 우수 고객에게 보험료를 할인해준다. 이 경우 가입자들은 보험료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건강을 챙길 유인이 생기고 보험사는 사망 확률이 줄어든 만큼 유리해진다. ‘IoT’ ‘빅데이터’ ‘핀테크’의 화두가 융합되고 결합돼 새로운 비즈니스나 서비스 기회가 생기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창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사생활 보호 등을 이유로 데이터 전송 및 빅데이터 축적을 아예 금지한다면 이런 좋은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해외의 일부 자동차 보험사들 중에는 운전자가 스마트폰을 갖고 운전하면 운전 속도 등의 기록이 보험사로 전송되도록 하고 회사는 이 데이터를 축적·분석해 우수 고객에게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카드사 정보 유출 사건을 겪은 이후 데이터 수집 자체를 금기시하는 움직임마저 눈에 띈다. 이 사건의 후속 조치 중 하나가 동일 지주회사의 자회사 간 정보 공유 금지 같은 조치였는데 이는 지주회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수준이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후속조치가 나오다 보니 항상 과도한 내용들이 포함된다. 데이터 수집은 허용하되 이를 더욱 엄격히 관리하도록 해야지, 데이터 자체의 수집과 축적을 금지해 버리는 것은 빅데이터 시대에 역행하면서 다른 화두와 연결된 새로운 혁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안전 수준을 제고해야지, 자동차를 없애자고 해서야 되겠는가.

주요 혁신의 부재 시대라고는 하나 그래도 혁신의 씨앗은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이들을 잘 키우고 이용하고 결합하면 다양한 서비스와 상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위험하다면서 혁신의 싹을 아예 자르면 안된다.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혁신을 유도하고 장려해야만 새로운 성장동력의 도입이 가능해진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실패를 일정한 정도까지는 용인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화두들이 주요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조치가 필요하다. 특히 정치권을 중심으로 보다 혁신 친화적인 거버넌스의 도입이 절실한 시점이다.

윤창현 < 서울시립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3344@dau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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