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입력 2015-05-22 18:20
수정 2015-06-01 09:34
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8)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20)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21)14세기 수월관음도, 고려 회화의 백미


고려가 몽골과 장기간 항쟁을 지속하던 1258년. 무장 김준에 의해 최의가 피살되면서 4대 60년간 이어지던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이 막을 내립니다. 1259년에는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가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로 가게 됩니다. 이때 그는 몽골 제국에서 왕위 계승 다툼을 벌이고 있던 쿠빌라이 칸을 만나게 됩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를 환대했으며, 이는 훗날 1270년 고려 왕실의 개경 환도 결정 이후에도 그나마 고려가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원의 내정 간섭과 ‘충’자 돌림 왕

그러나 고려가 온전히 자주국으로서 존재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은 고려의 내정에 심각하게 간섭했으며, 특산물은 물론 고려의 처녀까지도 공물로 요구하는 일을 저지릅니다. 원종은 이를 굴욕적으로 수용해 결혼뎔㉯?설치하는데, 당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왕실의 호칭도 부마국의 지위에 맞춰 낮아졌고,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시호에 ‘충’자가 붙게 됩니다.

한편 이런 원 간섭기에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유학의 학풍이 변화하고 신진 사대부층이 형성됩니다. 성리학은 원래 남송시대에 주자가 집대성했는데, 이것이 원을 통해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됩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고려의 성리학자 중에는 아예 원나라 수도인 베이징으로 건너가 그곳 문인들과 교류를 맺고 당대 최고의 학문을 논하던 학자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익재 이제현입니다.


조맹부와 학문을 논한 이제현

여러분은 성리학과 그 학자들이라면 조선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을 언뜻 떠올리겠지만, 이미 고려 후기 성리학이 수용되던 시기부터 이제현과 같은 학자들로 인해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이제현은 이미 1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했는데, 단지 하찮은 재주일 뿐이라며 만족하지 않고 학문 탐구에 매진합니다. 또한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관직에 나아가 국가를 위해 일하며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홀연히 사라집니다. 제자로는 목은 이색이 있는데,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권문세족에 맞서 개혁적인 성향으로 정몽주 등의 신진사대부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지요.

이제현은 충선왕 때 원의 수도 베이징부터 심지어 티베트까지 유람 아닌 유람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적 교류를 이뤄내게 되는데요. 그것은 당시 왕이었던 충선왕의 독특한 출신 때문이었습니다. 충선왕의 어머니는 쿠빌라이 칸의 딸이기도 해서 그는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왕인 것이지요.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칸의 조카이자 고려의 왕. 그래서 그는 자주 외가로 가기도 했으며, 또한 몽골 내부의 치열한 왕위 다툼과 모략에 휘말려 저 멀리 티베트까지 3년간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충선왕을 위해 중국을 오간 신하가 이제현입니다. 그는 왕을 따라 중국 강남 일대를 유람했으며, 원에 체류할 때에는 충선왕이 직접 만든 ‘만권당’이라는 사택에서 원나라의 문인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문인이라 일컬어지던 조맹부를 만나게 됩니다. 조맹부는 한족 출신의 사대부로 시·서·화에 능숙했는데, 그의 서체인 ‘송설체’는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 서체가 고려에 전해지게 된 계기는 당연히 이제현과의 만남 때문이었지요. 물론 충선왕 입장에서도 원의 최고 학자들과 어깨를 겨눌 만한 인물은 이제현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도 크게 작용했지요.


왕을 찾아 떠난 1만5000리 길

그 후 1320년 충선왕이 모함으로 티베트에 유배되자 이제현은 곧 상소를 올려 무고함을 호소했으며, 직접 왕을 알현하기 위해 1만5000리나 떨어진 당시 토번국(티베트)까지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제현은 충선왕 한 명에게만 충성을 바친 것은 아닙니다. 고려의 안위가 흔들릴 때마다 발벗고 나서 국가를 지켰으며, 공민왕의 반원개혁 정치를 지지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됐을 때에도 먼저 왕을 호위하며 고려를 지켰습니다.

또한 그는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고려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사략』이라는 역사서를 펴내며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을 하게 됩니다.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역옹패설』과 같은 시화집을 내기도 했지요.

이렇게 초창기 성리학의 수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제현을 통해 비록 고려 왕조는 쇠퇴기를 맞이했지만 그 후 조선의 국가 이념이 되는 성리학은 크게 번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박학다식함과 국제적 교류,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고려를 지켜낸 이제현의 사상과 행동은 이후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념적 바탕이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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