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집단이 마약밀매로 엄청난 돈을 챙긴다. 이들은 비밀금고에 돈을 숨기지만 또 다른 조직이 첩보를 입수,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이 금고를 결국 털고 만다. 누구나 한번쯤 영화에서 봤을 법한 소재다. 이런 범죄 오락물에 빠지지 않는 게 바로 금고다. 뭔가 비밀스럽거나 범죄와 연관된 돈, 탈세 등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떳떳하게 번 돈이나 개인적 소장품을 집에 보관하고 싶어 금고를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즘엔 초저금리가 지속되면서 고액 자산가들 중에는 은행에 돈을 맡기느니 그냥 집에 현금을 보관하겠다며 금고를 사는 이들도 꽤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금고가 잘 팔린다는 소식이다. 롯데백화점의 고급 금고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5~30% 정도 늘었다. G마켓의 개인금고 판매 증가율은 2012년 2% 정도였으나 지난해에는 15%로 껑충 뛰었다.
영어로 ‘safe’ 또는 ‘strongbox’로 불리는 현대식 금고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영국에서다. 자물쇠를 만들던 찰스 첩, 저마이어 첩 형제가 1835년 도난 방지용 금고에 대한 특허를 받고 생산을 시작한 것이 효시로 돼 있다.
현재 금고에 대한 UL 인증은 가장 낮은 ‘클래스125’부터 가장 높은 ‘클래스TXTL-60’까지 모두 9단계가 있다. 클래스125는 금고 내부 온도 52도, 습도 80%까지 내용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수준이다. 금고로서 최소한의 기능만 갖춘 셈이다. 최고 등급인 TXTL-60은 기계적· 전기적 절단 도구, 드릴, 전기톱, 산소용접기, 절단용 토치 등으로부터 60분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다. 또 110g 이하의 니트로글리세린(폭발물로 쓰이는 화약) 공격에도 끄떡없어야 한다.
가격만 최고 2억원에 달하는 독일산 명품 금고 되틀링이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는 소식이다. 96년 역사의 되틀링은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소량 제작하는 고급 금고로 ‘금고업계의 에르메스’라고도 불린다. 그런가 하면 화장실 천장 구멍에 500만원을 넣어뒀다 돈을 잃어버린 한 시민이 경찰에 도난 신고를 했다는 소식도 있다. 범인은 천장 속에서 살던 쥐로 밝혀졌고 돈은 무사히 찾았다고 한다.
2억원짜리 금고든, 천장 속이든 모두 소중한 돈을 보관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안전한 금고는 뭐니뭐니 해도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라는 말도 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도난당할 우려도 없고 언젠가 이자까지 보태져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