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생존 매뉴얼

입력 2015-05-17 20:39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올해 초 한 남성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작스런 심정지로 쓰러졌다. 승객의 신고를 받은 역무원들이 다음 역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 그때 옆에 있던 전직 간호사가 “자동제세동기(AED)를 빨리 갖다 달라”고 소리쳤고, 침착한 대응 덕분에 그는 목숨을 구했다.

자동제세동기는 가슴에 전기충격을 가해 심정지 환자의 심장박동을 되살리는 기기다. 지하철역을 포함한 공공시설에 설치돼 있다. 그런데 사용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생활안전연합 조사 결과 직장인의 4.6%에 불과했다. 45%는 자동제세동기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한 해 심정지로 사망하는 사람이 2만4000여명인데도 이렇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어릴 때부터 의무적으로 ‘생존 매뉴얼’을 가르친다. 미국은 화재, 교통, 총기, 마약, 태풍, 학교폭력 대응책에 토네이도, 지진 매뉴얼까지 익히게 한다. ‘안전 천국’ 스웨덴에서는 3세 때부터 실사례 중심의 안전 교육을 시킨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미국 재난방재청의 민간인 재난대비 매뉴얼은 물을 정수하는 법까지 가르친다. 요오드나 과산화수소, 락스를 사용하라는 게 특鎌求? 농도가 높은 것은 세척제로 쓰이지만 희석시키면 살균 작용 덕분에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생존 매뉴얼은 너무나 많다. 표준 매뉴얼과 실무 매뉴얼, 현장 행동 매뉴얼 등 3000개가 넘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실제 상황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지침끼리 얽혀 역효과를 부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차라리 최소한의 매뉴얼을 최대한 활용해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게 시급한데, 사고 때마다 책임자 처벌 등 ‘뒷북 징계’에만 열을 올린다.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만큼이나 재발을 막는 예방책이 중요한데도 그렇다.

그나마 학생들의 안전 교육은 강화되고 있다. 오늘부터 닷새간 교육부 산하 2만여개 기관이 재난대응 훈련에 나선다. 올해는 이틀이나 기간을 늘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은 여전하다. 전·현직 경찰관 두 명이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며 실속형 ‘생존 매뉴얼 365’를 펴냈다. 위기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데 필요한 실용 지침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외딴곳에서 급히 구조를 요청해야 할 때 전봇대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전국에 850만개 있는 전봇대는 도심에 약 30m, 농촌에 50m 간격으로 설치돼 있고 고유번호가 적혀 있어 금방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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