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정치판 닮은 위기의 식약행정

입력 2015-05-13 20:58
수정 2015-05-14 05:37
백광엽 생활경제부 차장 kecorep@hankyung.com


[ 백광엽 기자 ] 공무원연금 개혁이 ‘국민연금 끼워팔기’라는 거센 비판에 길을 잃었다. 보름 전만 해도 여야 김무성·문재인 대표는 협상안에 사인한 뒤 웃음 가득한 얼굴로 카메라 플래시를 받았다. 공무원들의 환심을 사고 표를 얻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야합은 대한민국을 패자로 만들었다. 미래 세대가 국민연금 빚더미에 앉게 됐기 때문이다.

'세월호' 연상되는 '백수오' 파문

4주째로 접어든 ‘가짜 백수오’ 사태도 국민 모두를 패배로 몰아가고 있다. 김승희 식품의약품안전처 처장은 백수오에 불법 혼합된 이엽우피소의 유해 논란에 대해 ‘섭취해도 문제 없다’는 주장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그의 발언과 달리 미국과 중국 등에서는 이엽우피소의 독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사태의 장본인인 내츄럴엔도텍도 유해하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올려 뒀다. 최소한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 처장의 성급한 ‘무해’ 발언은 상식선에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유해성을 인정玖?후폭풍을 감당 못할 것이란 고려가 작용했을 듯하다. 그랬다면 작은 승리에 집착해 국민 건강이라는 대의를 놓친 잘못된 판단이다.

이번 사태는 작년 이즈음의 세월호 침몰을 연상시킨다. 우선 많은 생명이 위협받는 점이 비슷하다. 소화기 장애, 간 손상, 자궁근종 등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중장년 여성들의 신고가 소비자원으로만 하루 300여건씩 접수되고 있다. ‘관련자들을 살인죄로 구속하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식약처의 무능 행정 역시 우왕좌왕했던 해양경찰에 밀리지 않는다. 이엽우피소의 백수오 둔갑은 10년 전부터 심각성이 제기돼 한약재 종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런데도 늑장 행정에다 2월 첫 조사에서 ‘혼용이 없다’는 엉뚱한 결론까지 내리며 사태를 키웠다.

식약처, 무능하거나 타락했거나

식약처가 내츄럴엔도텍에 유독 관대했다는 시각도 있다. 기능 인증 심사나 제조과정 감시 등 전반이 허술했다는 주장이다. 더 정확히 확인해보자는 취지였다고 하지만 ‘가짜 백수오’ 제조사 명단에서 내츄럴엔도텍만 빼려는 시도도 감지됐다. 이런 정황들은 김재수 내츄럴엔도텍 사장이 끝까지 조사결과를 부인하며 버틴 이상행동과 맞물려 의구심을 키웠다.

진짜 문제는 타락 조짐을 드러내고 있는 식품 행정이다. 한 식품회사 관계자는 “업계가 합리적인 건의를 해도 무시하고, 사고가 터지면 제도 개선을 빌미로 규제를 강화하는 꼼수를 반복해 왔다”고 전했다. 식약처의 한 위원회에 참여했던 학자도 ‘업자든 학회든 식약처에서 연구비를 타내고, 그 돈으로 식약처를 접대하는 부패사슬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진단했다.

의약 식품 축산 행정 등 이질적인 전문가들이 모이다 보니 파벌 문화도 만연해 있다. 고위 퇴직자들은 유관기관 등에 낙하산으로 날아가 ‘식피아’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약사 출신이 요직을 장악한 탓에 ‘팜피아’ 논란도 만만찮다.

한 TV홈쇼핑사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정치판이다. 왠지 이상해 우리는 진작부터 백수오 판매를 줄여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며 “앞으로도 비상식적인 일들이 잇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월호에 이어 ‘우리 수준은 역시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는 점을 다시 확인한 뒤의 무력감이 오래갈 것 같다.

백광엽 생활경제부 차장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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