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옛날부터 그랬어요"는 직원 금기어 1순위…"지금 즉시" 강조하는 '외유내강형 리더'

입력 2015-05-05 20:43
CEO 오피스 - 김병호 하나은행장


경영협의회 틀을 깨다
보수적인 은행서 함께하는 토론 강조…일반 직원들 주인의식 높아져

해외출장에 시간 낭비란 없다
취임 후 1박 2일 런던 출장…지점 방문 등 빡빡한 일정 소화

'스피드 경영' 강조
부서 간 충돌 땐 '교통정리'…한 박자 빠른 결단으로 비상 꿈꿔


[ 박한신 기자 ] 하나은행은 김병호 행장(54)이 지난 2월 취임한 뒤 보고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행장에게 보고하는 부서장들의 표정이 부쩍 밝아졌다. 예전엔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상황이 좋지 않으면 질책받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김 행장은 부서장들을 질책하는 대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게 한 뒤 함께 토론한다.

오히려 김 행장이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는 아랫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다. 현안을 꼼꼼히 연구하지 않는 부하 직원들도 혼쭐이 날 각오를 해야 한다. 하나은행의 한 임원은 “상당수 최고경영자(CEO)들이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질책부터 하는 경우가 많지만, 김 행장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하기 때??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만 일에 대한 책임감은 더 무거워졌다”고 했다.

차장·과장급 직원 역할 키워라

분위기 변화가 임원과 부서장 사이에서만 생긴 것은 아니다. 조직의 허리인 차장, 과장, 그 아래 행원급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김 행장은 취임 때부터 ‘옛날부터 그랬어요’라는 사고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해왔다. 임직원들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관행적인 사고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김 행장은 이를 위해 취임 후 경영협의회 진행 방식부터 과감히 바꿨다. 경영협의회는 은행장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대형 투자나 제도 변경 등의 주요 안건을 임원진이 모여 결정하는 회의로 이사회를 제외하면 사실상 은행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예전엔 경영협의회 안건을 부서장이 발표하면 임원들이 논의를 거쳐 결정하는 구조로 실무 직원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김 행장은 안건 발표를 차장·과장에게 맡기도록 했다. 해당 사안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는 당사자가 차·과장급 직원이고, 발표 자료도 대부분 그들이 작성하는 만큼 의사결정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김 행장은 예전부터 기존의 경영협의회 분위기를 매우 싫어했다”며 “임원들이 모여 눈치 보면서 행장 의중대로 찬반을 정하는 게 대부분인데, 그럴 거면 경영협의회는 왜 하느냐는 생각이었다”고 귀띔했다. 김 행장이 위아래를 막론하고 토론과 의사결정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배경이다.

보수적이고 격식을 따지는 은행에서 이 같은 결정은 파격이었다. 하지만 일반 직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직원들의 책임감을 부쩍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경영진은 직원의 의견을, 직원은 경영진의 사고방식을 서로 알게 됐다. 과장급 직원은 “내가 처음부터 짠 안건이 경영진에게 소개되고 그게 받아들여지는 건 벤처회사에서나 가능한 걸로 생각했다”며 “은행에 들어와서 처음 느껴보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원래 단기자금을 융통해주던 옛 단자회사에서 출발해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인 토론과 협업 문화가 강했다. 주인의식도 높았다. 하지만 여러 은행과의 합병을 거쳐 대형화하면서 조직문화가 많이 ‘관료주의화’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김 행장은 하나은행 고유의 기업문화를 복원하는 데 힘 쏟고 있다.

‘성골’ 편견 깬 솔선수범

김 행장은 하나은행의 전신인 단자회사 한국투자금융 출신이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과도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골 출신’이니 ‘누구의 최측근’이니 하는 얘기도 많이 돌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친 것도 시기를 받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김 행장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실력과 열정으로 이 같은 얘기를 가라앉혔다.

김 행장과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업무 능력뿐 아니라 합리적이고 소탈한 성품을 장점으로 꼽는다. 1987년 畸뮴塚未鳧뗄?입사한 김 행장은 1989년 선진 금융을 배우기 위해 사직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크지 않은 현지은행에 다니다가 1991년 다시 하나은행으로 돌아왔다. 2002년엔 하나은행 뉴욕지점장도 맡았다.

권위의식 없는 솔선수범은 강압적인 지시가 아니라 팀워크를 통해 성과를 내야 하는 해외 생활을 통해 익힌 것이다. 행장이 먼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직원들이 움직인다고 그는 믿고 있다.

김 행장은 취임 후 첫 해외 출장을 런던으로 다녀왔다. 출장 기간은 고작 1박2일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금융전문지 유로머니의 시상식에 참석했고, 다음날 아침엔 거래처 한 곳에 들렀다. 외환은행 런던지점을 찾아 직원들과 점심을 먹은 뒤 귀국 비행기를 탔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CEO의 건강 때문에라도 이런 빡빡한 일정은 잡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김 행장은 자투리 시간을 비워두면 출장 계획을 반려하기 일쑤”라고 전했다.

아이디어 좋으면 바로 실행

김 행장이 요즘 강조하는 것은 ‘지금 즉시’다. 회의와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가 나오면 지금 당장 실행하라고 다그친다. 실행하지 않는 아이디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행장이 다그치지 않으면, 은행 업무의 특성상 좋은 아이디어라도 추진되지 못하고 사장되기 십상인 까닭이다. 보수적인 은행 조직에선 예산 문제와 부서 간 협의, 인력 충원 등의 문제에 걸려 추진 동력이 떨어져 ‘유야무야’ 되기 일쑤인 것을 그는 숱하게 봐왔다.

이 때문에 김 행장은 즉시 실행해야 할 아이디어가 있으면 비서실장을 직접 부른다.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과 협의해 부서 간 교통정리를 하고 예산 문제 등을 해결하도록 한다. 아무리 풀기 어려운 문제도 CEO가 직접 나서면 많은 경우 정리가 되기 마련이다. ‘말로만 혁신’이 아닌 조그만 것이라도 시작하는 데서 결과물이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저금리로 수익성이 곤두박질친 가운데 국내 은행들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하나은행도 마찬가지다. ‘만년 4위’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하나은행의 빠른 도약을 향한 김 행장의 도전을 금융계가 주목하고 있다.

프로필 △1961년 서울 출생 △1980년 명지고 졸업 △1984년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1987년 한국투자금융 입사 △1989년 퍼스트내셔널뱅크오브시카고(FNBC) 입행 △1991년 하나은행 입행 △1998년 국제센터 지점장 △2002년 뉴욕지점장 △2005년 하나금융지주 설립기획단 팀장 △2008년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최고재무책임자·CFO) △2009년 하나은행 경영관리그룹 총괄 부행장 △2013년 하나은행 기업영업그룹 총괄부행장 △2014년 하나은행 마케팅그룹 겸 글로벌사업그룹 총괄 부행장 △2015년 하나은행장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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