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러시아 전승기념일

입력 2015-05-05 20:39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1945년 5월8일 오후 10시43분 베를린 소련군 사령부. 독일군 원수 빌헬름 카이텔이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비롯한 연합군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시차가 두 시간 빠른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9일 0시43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이 유럽 국가에선 5월8일, 러시아와 옛 소련 국가에선 5월9일로 서로 다른 이유다.

독일군은 이보다 앞서 5월7일 프랑스 연합군 사령부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서명해야 한다고 반발해 다시 이뤄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역할은 그만큼 컸다. 무엇보다 희생자가 많았다. 당시 소련 인구가 1억6000만명이었는데 2700만~2800만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 소련군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바다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이 동유럽 전선에서 고군분투했다.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지켜낸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등이 2차대전의 승기를 잡는 분수령이었다. 전쟁 막바지 베를린 점령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5월9일이 공식적인 2차 세계대전 승전일로 인정받고 있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서방국가들의 부채 의식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의 부패와 무자비한 숙청, 세력 확산을 위한 공포 및 정보 정치, 북한 등 위성국가 건설을 통한 이념전쟁 등 이후 소련이 저지른 악행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공헌을 점점 잊게 만들었다. 특히 서방과의 냉전 과정에서 러시아 전승기념일은 점점 잊혀져 갔다.

러시아가 전승기념일을 외교무대로 활용하게 된 것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냉전체제가 무너진 1990년대였다. 1995년 50주년 기념식 때는 경제난 속에서도 무려 1700억달러를 투입해 전승기념 행사를 벌였을 정도였다. 당시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을 포함해 51개국 정상이 대거 참석했다. 10년 전인 2005년 60주년 전승기념일에도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등 53개국 정상들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올해 기념행사는 집안 잔치로 끝날 모양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불만을 품은 미국과 서방 정상들이 모두 불참을 통보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겨우 체면을 살려줬을 뿐 한국은 물론 믿었던 북한도 특사 파견으로 방향을 바꿨다. 전승의 공을 내세우기엔 세월이 많이 흐른 모양이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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