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가발

입력 2015-04-26 20:33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가발의 원조는 이집트다. 이집트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머리를 밀고 가발을 사용했다. 햇볕차단용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래도 장식용이었다.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파라오는 가발을 쓰지 않고는 결코 대중 앞에 서지 않았다. 그때도 가발 재질이 인모(人毛)냐 양털이냐를 따졌다. 이집트만큼 가발을 꾸몄던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 궁정의 사치가 최고조에 달한 1660년에는 가발관리사가 20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똑바로 눕는 게 불가능할 만큼 가발 길이는 길어졌다. 특히 루이 14세의 가발은 허영의 극치였다. 나폴레옹이 가발을 하지 않으면서 이런 풍토는 차츰 사라졌다.

우리나라도 가발의 역사는 이들 나라 못지 않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가발의 흔적이 엿보인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 여성들의 머리 모양을 “아름다운 머릿결을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비단으로 장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작 조선시대 여성들의 가체(加)는 대단했다. 후기에 들어서면 가체를 머리에 이고 있지도 못할 만큼 커졌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부잣집 며느리가 13세에 가체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했는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슬프도다”고 적고 있다. 영조 때 이런 가체를 금지하는 가체금지법까지 만들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에선 이런 전통이 없었다.

가발은 아이러니컬하게 한국 근대화를 이끌던 아이콘이었다. 완제품 인모 가발을 수출한 것은 1962년부터다. ‘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는 1960~1970년대 동네 골목마다 흔히 들을 수 있던 소리였다. 이 머리카락들은 물론 가발회사에 팔려나갔다. 가체를 만들었던 한국 여성들의 뛰어난 솜씨로 다양한 가발이 미국으로 수출됐다. 1970년에는 가발 품목이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했다. 가발공장이 수백개에 달했으며 가발 여공만 2만1000여명이었다. 당시 미국이 수입한 가발 중 50%가 한국산이었다. 화학섬유로 만든 가발도 있었지만 인모를 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가발산업은 차츰 사양화 길을 걸었다. 노동집약 산업의 한계였다.

최근 들어 가발산업이 다시 급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매출이 2004년 500억원에서 2014년 1조2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3차원 스캐너, 형상기억 등 기술과 디자인이 접목된 새로운 패션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가체의 전통이 다시 빛을 발하려나.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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