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 "운이 억세게 좋다고요? 스프링클러 맞고 OB나 프로 데뷔 2년 늦었어요"

입력 2015-04-20 20:53
샷 이글 역전우승 드라마 쓴 빨간바지 김세영

경기 전날 이마에 새똥 맞아 '대박 예감'
빨간 바지는 그 색깔 좋아 입는 것일 뿐
마지막홀 샷 이글은 사실 드로로 친 것


[ 이관우 기자 ]
“경기 전날 하와이 해변에 친구랑 같이 누워 있는데 새똥이 이마에 떨어졌어요. 친구가 그러더군요. 대박 날 징조라고요.”

미국 LPGA투어 롯데챔피언십 우승자 김세영(22·미래에셋·사진). 그는 20일 “대회 참가 전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며 까르르 웃었다. 이날 오전 기자와의 단독 전화 인터뷰에서다. 예감이 적중했던 것일까. 그는 연장전에서 자신의 우상 박인비(27·KB금융그룹)를 꺾고 두 번째 LPGA 우승컵을 낚아올리며 세계 골프팬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칩샷 파세이브와 이글샷 두 방으로 일군 기적 같은 우승은 LPGA 역사에 각인될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적 같은 칩샷과 이글샷을 꽂아 넣었을 때의 느낌이 우선 궁금했다.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우승하고 나서 (박)세리 언니랑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아이고 잘했네. 어떻게 그걸 집어넣었느냐. 축하한다’며 신기해하더라고요. 그게 들어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17번홀 퍼팅 실수 탓에 단독 3위로 경기를 마친 김인경(27·한화)도 축하해줬다. 김인경은 “(세영이가) 그렇게 경기를 극적으로 끝낼 거였으면 애초부터 열심히 하지 말 걸 그랬다”며 웃었다고 한다.

김세영은 승부사 기질이 강한 선수다. 흔들리는 법이 별로 없다. 하지만 18번홀 티샷 실수는 그의 멘탈을 흔들어놨다. 스위트스폿에 제대로 맞은 볼은 뒷바람까지 실려 250m를 날아 해저드로 들어가고 말았다. “너무 억울해 말도 안 나왔어요. (샷을)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니까. 화를 많이 내던 옛날 습관이 다시 도지더라고요.”

스스로 무너질 뻔한 위기의 순간, 캐디 폴 푸스코(47·미국)가 그를 구해줬다. 푸스코는 “지금 화내면 안 된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하늘을 한번 보라”고 조언했다. 18피트(5.4m)짜리 웨지 칩샷으로 파세이브를 하고,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간 반전의 시초였다.

그는 생애 통산 7승을 모두 극적인 역전으로 장식했다. 그때마다 늘 빨간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3타 차로 앞서다 역전패한 이달 초 ANA인스퍼레이션 대회 때는 평소와 달리 반바지를 입었다. 그래서 졌을까.

“원래 빨간색을 좋아한 것뿐이지 미신을 믿지는 않아요. 티셔츠를 입고 싶었는데 타이거 우즈(40·미국)를 따라 한다고 할 것 같아서 그냥 바지를 택한 겁니다. 국내 프로 데뷔 때부터요.”

생애 첫 메이저대회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ANA인스퍼레이션은 ‘쓴 약’이 됐다고 그는 털어놨다. 불면증이 걸릴 정도로 분했지만 깨달음은 그만큼 컸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최상의 순간이 온다고 자신만만하게만 살았는데, 최악의 순간도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프로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김세영에 대해 주변에선 ‘억세게 운이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유독 많아서다. 하지만 그는 “나는 오히려 운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고 정색했다.

“고2 때 참가한 국내 오픈 대회에서 잘 맞은 드라이버샷이 페어웨이 가운데 있는 스프링클러에 맞아 OB(아웃 오브 바운즈)가 났습니다. 그거 아니었으면 대회 우승하고, 지금보다 2년 빨리 프로에 데뷔했을 거예요. 그 OB 하나 때문에 2부투어에서도 뛰어야 했어요. 당연히 LPGA에 진출하는 것도 2년은 늦어진 거죠.”

운도 아니라면 놀랄 만큼 이른 나이에 얻어낸 성과는 무엇 덕분이라고 자평할까. 그는 ‘갈망’이라고 잘라 말했다. “갈구하면 실현된다는 걸 요즘처럼 실감하는 때가 없습니다. 불운이 닥쳐도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건 진짜 리얼이에요, 하하.”

김세영은 며칠 쉰 뒤 오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LPGA 10번째 투어 스윙잉스커츠클래식에 참가한다. 리디아 고(18·캘러웨이)가 디펜딩 챔피언. 김세영은 US오픈 우승과 세계랭킹 톱5를 목표로 세운 만큼 대회 하나하나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샷을 똑바로 칠 수 있느냐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똑바로 치겠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해요. 프로도 대다수 볼이 휘거든요. 제가 마지막에 친 이글샷도 사실은 드로샷(오른쪽으로 출발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구질)이었어요. 자신의 특성을 받아들여야 스트레스도 없고, 그래야 오래 골프를 즐길 수 있습니다.”

■ 전 캐디가 말하는 김세영
“승부처에선 신들린 무당처럼 눈빛 달라져요”

“골프에 대한 자기 확신이 대단합니다. 거의 신념 수준이에요.”

김세영이 LPGA에 진출하기 전 1년가량 골프백을 메줬던 캐디 한준 씨(30)는 그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골퍼’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컨드 샷으로 그린을 공략할 때 퍼팅을 하기 좋은 곳에 떨어뜨리라고 조언하면 그냥 핀(깃대)을 보고 샷을 날린다고 한다. “거기로 치면 위험해”라고 하면 꼭 그쪽으로 치고 마는 게 김세영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19일 롯데챔피언십 우승을 결정지은 18번홀 연장 이글샷은 그런 ‘소신’이 공격적 성향으로 나타난 경우다. 이런 일화도 있다. 그는 프로 데뷔(2010년) 1~2년차 때 볼에 선도 안 긋고 퍼팅을 했다. 자기 감을 철저히 믿는다는 얘기다.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감이 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습하러 가기도 하고, 아니다 싶으면 경기 도중에 퍼터를 바꾸기도 합니다. 자기만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하지만 한씨도 김세영이 문득 무서울 때가 있다고 했다. 연장전에 가면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위기에 처할수록 오히려 고도로 집중하고, 그 자체를 극복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승부사 기질이 절정에 오른다는 얘기다. ‘신들린 무당’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건 천성적인 ‘긍정 마인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하면 되지 뭐.’ 늘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단점을 다 덮고도 남는 장점이에요. 한마디로 타고난 골퍼죠.”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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