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왜 나를 이 집에서 태어나게 했을까?’ 주인이 없음에도 여전히 당당하고, 제자리에 없지만 오롯이 존재했을 생가(生家)에 대한 단상이다. 인걸은 산하의 정기가 모여 태어나고, 신령한 땅은 늘 유풍 여운이 없어지지 않음을 흠모한다. 한데 나고 자라 쌓인 시간은 사람의 흥폐를 만들고, 흥하면 생가(生家)이나 폐하면 망가(亡家)로 잊혀져 간다.
사람의 일생에 고토(故土)는 세 곳이다. 부모로 인해 나고 자란 ‘숙명(宿命)의 생거지(生居地)’, 하늘로 치솟아 뜻을 펼칠 ‘운명(運命)의 적거지(適居地)’와 하늘이 나에게 목숨을 빌려주고 거둔 ‘천명(天命)의 사거지(死居地)’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명(命)에 대해 역사소설 ‘대망’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렇게 정의한다. “쟁반 위에 찻잔이 있다. 찻잔은 곧 내 자신이다. 찻잔은 쟁반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다 가장자리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마음대로 움직일 때까지는 운명이나 막힘은 숙명이다. 천명이란 쟁반, 가장자리, 찻잔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천지의 명이다. 따라서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도쿠가와의 말처럼 생거지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숙명이다. 위대한 철학자 고타마 싯다르타도 룸비니동산에서, 위대한 실천가 예수 그리스도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탄생 시간과 잉태한 이의 선택에 따라 나의 탄생지가 좌우되는 셈이다. 내 선택권은 물론 없다.
풍수학에서 새 생명의 탄생 공간은 미래 운명의 향방에 영향을 준다. 생명은 탄생과 동시에 온몸으로 거대한 산천 정기와의 에너지 교환을 시도한다. 우주 생명인 중성자별의 폭발 에너지가 우주에 스며들며 별을 낳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때 생기가 충만한 땅의 생명지기(生命地氣) 기운은 성인 징후 이전까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던 날 추사고택 뒤뜰의 우물 물이 마르고 팔봉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구전이 뜬금없는 설화는 아니다. 물론 어찌 다만 땅의 승경만 위대하다 하겠는가. 바로 그 주인과 융합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융합 속에 쟁반의 가장자리 생거지를 운명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생가가 남아 있는 이는 각 분야의 큰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철학은 ‘생가복원사업’의 ‘관광 명소화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 덕분에 기념관에 박제돼 부가가치 창출에 앞장서는 꼴이 되었다. 누추한 생가가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숙명을 깨는 하늘의 천명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훌륭한 성품에 좋은 환경적 기질을 더할 수 있다면 아파트 생가라고 해 이상할 게 무엇일까.
강해연 < KNL디자인그룹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