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강해야 융합시대 승자 된다 (2) 입시에 갇혀 멀어지는 융합교육
"수능만을 위한 공부"
물리2·화학2 등 선택 적어…대부분 형식적 수업 전락
학생 "내신은 벼락치기로"
과학적 호기심 키워줄 실험수업도 사실상 '실종'
[ 임기훈 / 김태훈 기자 ]
경기 지역 A고등학교의 3학년 화학2 시간.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했는데도 절반 이상의 학생들은 좀체 집중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보건 말건 다른 과목 교과서를 뒤적이는 학생이 적지 않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에서 화학2를 선택한 학생이 거의 없다 보니 교사도 학생도 수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한 학생은 “화학2 교과가 내신에 들어가지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벼락치기로 시험만 잘 치르면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학생의 교과 선택을 확대하고 융합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고교 교과목 수를 대폭 늘려왔다. 하지만 수능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정규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한다. 교육 현장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교육 방식과 수능 제도 전반을 함께 손보지 않으면 융합 시대 승자가 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어려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배로 늘어난 교과목 수
교육부가 작년 9월 발표한 2018년 문·이과 통합교육 교과 구성안에는 100개의 과목이 들어 있다. 현재 고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을 필수, 일반선택, 진로선택으로 나눠 재구성한 것이다. 국어·영어·수학·한국사·통합과학·통합사회·과학탐구실험 7개 과목은 공통 필수과목이다. 여기에 수학1·수학2 등 일반 선택 과목이 51개, 실용영어·실용수학 등 진로선택 과목도 42개나 된다.
고교 교과목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5·31 교육개혁 이후다. 학생들의 학습 선택권을 강조하면서 1990년대 후반 과목 수를 46개에서 87개로 늘렸고 2000년대에는 100개로 확대했다. 철학·심리학·교육학·환경·융합과학 등이 1990년대 이후 신설된 과목들이다.
하지만 교과목이 늘어나도 학생의 선택권이 늘어난 효과를 거둔 건 아니다. 수능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가르칠 교사가 없는 진로선택 과목 상당수는 수업을 개설조차 할 수 없어서다.
인천 B고등학교 교사는 “교육부는 국·영·수 수업을 전체 교육 시간의 50% 이내로 제한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가 독서·문학·영어독해·실용수학 등 연계과목을 이용해 도리어 국·영·수 수업시간을 늘려 운영하고 있다”며 “대입에서 명문대를 얼마나 많이 보내느냐가 중요한 현실에서 과목 선택권 확대는 그저 이상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교과목 분류를 놓고도 논란이 빚어진다. 교육부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부터 물리1·화학1 등은 일반선택, 물리2·화학2 등은 진로선택으로 분류했다. 진로선택 과목 상당수는 실용영어·여행지리·음악합창 등 수업 중요도가 떨어지는 과목이다.
권오현 서울대 입학본부장은 “진로선택 과목은 입시에 반영될 확률이 낮은 과목”이라며 “이공계 학과에서 필수로 요구하는 과학심화 과목이 어떤 기준에서 진로선택으로 분류됐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필수에서 빠진 과학
교과목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과정에서 입지가 가장 축소된 과목 중 하나가 과학이다. 과거 문과 학생들도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등 과학 네 과목을 필수로 배웠지만 1997년 적용된 7차 교육과정부터 과학이 필수과목에서 빠졌다. 2005년 선택형 수능 도입 후에는 문과 및 예체능 계열을 지원하는 60%의 학생이 과학 분야에서 한 과목도 보지 않고 대학에 진학한다. 이과생이 수능에서 선택해야 하는 과학 과목 수도 줄었다. 네 과목을 선택해야 하던 게 2012년에는 세 과목, 2014년에는 두 과목으로 줄었다.
서울 A여고의 과학교사는 “과학 수업시간이 축소되면서 그나마 아이들의 과학적 흥미를 키워줄 실험수업은 사실상 학교에서 사라졌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학생의 학습 부담을 줄여 사교육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 같은 개편을 단행했다. 과학학습이 필요한 학생들은 선택과목 등을 이용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입시 위주인 한국 특유의 교육현실과 맞물려 과학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과목’으로 전락했다는 게 과학계의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이공계 인재 육성은 물론 전체 학생들의 기본 과학 소양 교육조차 과거보다 퇴보한 게 문제”라며 “수능이라는 꼬리가 몸통인 교과과정을 흔드는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대입 제도를 적절히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 김태훈 IT과학부 차장(팀장), 임기훈·오형주(지식사회부), 강현우(산업부), 임근호(국제부), 박병종(IT과학부) 기자
임기훈/김태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