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서울시가 일본식 한자어 등 행정용어 23개를 순화해 쓰기로 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견출지는 ‘찾음표’로, 시말서는 ‘경위서’로, 식비와 식대는 ‘밥값’으로 바꾼다는 식이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재 잔재를 우리말로 순화하겠다는 뜻은 이해한다. 그러나 23개 용어 정도로 될 일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민법에서 일본식 민법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어휘가 60%나 된다. 우리가 쓰는 말에 일본식 한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화 과정에서 한 발 앞선 일본이 서양 용어를 한자어로 먼저 번역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간 동안 한국에 일본식 한자가 대량 유입됐다.
일본은 서양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어력이 좋은 한자를 사용해 수많은 개념어를 선점했다. 이 작업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등 당대 학자들이 참여했다. 희랍어에 연원을 둔 필로소피(philosophy)를 밝은 학문이라는 뜻의 ‘철학(哲學)’으로, 에듀케이션(education)은 가르치고 기른다는 ‘교육(敎育)’으로 번역했다. 기존 한자어의 의미를 잃고 현대적 의미를 갖게 된 문화, 경제, 자유, 대학, 민주, 회사 등이 모두 일본식 한자다.
일본은 조어법을 발전시키며 글로벌 용어들을 계속 번역해왔다. 원래 쓰이던 한자어에 새로운 의미를 넣는 방법을 보면 ‘죄인들을 놓아 보내다’는 말인 방송(放送)은 ‘전파를 활용한 매스컴’이란 뜻을 갖게 됐다. 초상화의 뜻으로 쓰였던 사진(寫眞)은 포토그라피(photography)를 번역하는 데 썼다. 각각의 한자를 합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에어포트’를 번역하면서 하늘(空)과 항구(港)를 합쳐 공항이라고 했고, 오토모빌(automobile)은 스스로 가는 차라는 뜻의 자동차라고 불렀다.
그래도 중국은 뒤늦게 자체적으로 번역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비행기, 기차, 야구, 회사, 영화 등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인다. 중국에선 각각 비기(飛機), 화차(火車), 봉구(棒球), 공사(公司), 전영(電影)이라고 한다.
서울시의 뜻을 모르지 않지만 일본식 한자를 순화하자면 교과서나 신문 용어도 다 바꿔야 할 것이다. 문화의 힘이 개념어에서 나오는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안타깝다. 영어로 된 새로운 용어들이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온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식 번역어를 만들어 새로운 개념어를 선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조어에 도움이 되는 한자도 더 전향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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