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삼성·SK도 미련 버리는데…

입력 2015-04-08 20:40
고경봉 증권부 차장 kgb@hankyung.com


삼성과 한화가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테크윈을 주고받는 ‘빅딜’을 한 지 100여일이 지났지만 이 거래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간 자발적 구조조정의 첫 사례인 데다 거래 규모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의미있는 포인트는 ‘삼성이 팔았다’는 데 있다. 60조원가량을 쌓아둔 국내 최대 기업이, 돈이라면 아쉬울 것 없는 ‘현금부자’ 기업이 수십년간 그룹의 한 축을 지탱해온 중화학 부문을 매각한 것이었다.

삼성의 행보가 두드러져 보인 것은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부의 모습이 투영돼서다. 동부건설이 동부익스프레스 경영권까지 내줬더라면 법정관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사모펀드(PEF)에 동부익스프레스 지분을 팔면서 ‘경영권을 유지하고 나중에 지분도 되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 때문에 예정가격 기준 4500억원어치 지분을 3000억원에 내준 게 아쉬운 대목이다.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지난 2~3년 사이에 공중분해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룹들은 동부처럼 파는 것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웅진그룹은 2012년 자芙??빠지자 그룹 최대 계열사인 웅진코웨이(현 코웨이)를 시장에 내놨다. 최종 매각까지는 1년이 걸렸다. 매각에 착수한 뒤 협상자가 네 차례나 바뀌었다. 그룹의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된 상황에서 치명적 시간 낭비였다. 당초 GS리테일이 가장 높은 가격을 썼지만 그룹 수뇌부는 경쟁사에 파는 게 내키지 않아 미적거렸다. 그 와중에 PEF들이 ‘나중에 되사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들이밀며 시간을 끌었다. 웅진코웨이는 결국 ‘골든타임’을 다 놓치고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 매각됐다.

4만여명의 개인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안긴 동양그룹도 아쉬움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동양은 과감한 매각에 나선 덕분에 불과 1년 반 만에 법정관리에서 벗어났고 빚도 3분의 2 이상 갚았다. 동양매직, 동양파워(현 포스파워), 동양증권(현 위안타증권) 등은 비교적 후한 가격에 팔렸다. 동양이 법정관리 전에 스스로 팔았다면 그룹을 통째로 살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STX에너지를 놓치기 싫었던 STX그룹, 대우건설을 끝까지 움켜쥐었던 금호그룹도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의 길로 내몰렸다.

진통제 끊어야 산다

대기업들이 우량 계열사 매각을 주저한 데는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하는 고심과 함께 PEF들의 은밀한 제안도 한몫했다. 어려운 기업들을 찾아가 ‘나중에 되사게 해줄테니 넘겨라’는 식의 이른바 ‘파킹 계약’이 구조조정의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다른 기업의 실패 사례를 지켜보면서도 정작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대기업들은 또다시 PEF가 내어주는 ‘마약성 진통제’를 끊지 못하는 양상을 보였다.

최근 SK는 SK E&S의 발전소 세 곳을 팔았다. SK의 에너지 관련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기 위한 자금 마련 차원이다.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는 곳이다 보니 팔기 아깝다는 평가도 많았다. SK는 외부에서 충분히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무구조를 훼손하는 대신 우량 기업을 팔아 재무구조를 살리는 선택을 했다. 투자업계가 삼성과 SK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몸을 살리기 위해 과감히 썩은 손가락을 잘라낼지, 일시적 진통제를 맞으며 불확실성을 안고 갈지는 기업들이 선택할 몫이다.

고경봉 증권부 차장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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