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력사업 무너져도 살 길 찾았다
필름이 만든 새 기회
LCD 편광판 부품 만들고 콜라겐 활용 화장품 생산
에볼라 치료제도 개발
구조조정은 과감하게…한해 5000명 감원하기도
[ 남윤선 기자 ]
일본 도쿄 아카사카의 후지필름 본사에서 만난 아오키 다카오 기획팀장은 기자에게 가장 먼저 빨간병에 포장된 화장품 ‘아스타리프트’와 각종 영양제를 보여줬다. 후지필름은 자체 개발한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 ‘아비간’의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세계 최초다. 아오키 팀장은 “모두 필름의 친척들”이라고 소개했다. 필름의 원천기술을 발전시켜 만든 제품들이란 설명이다.
2000년대 들어 필름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고 업체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후지필름은 필름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았다. 원천기술에 대한 깊고 창의적인 연구와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환골탈태’에 성공한 대표적인 일본 기업으로 꼽힌다.
○디지털카메라 등장으로 위기 맞아
후지필름은 1934년부터 카메라용 필름을 만들었다. 미국의 코닥과 함께 오랜 기간 시장을 과점했다.
200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디지털카메라 등장 때문이다. 2000년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고모리 시게다카 현 회장은 “도요타에서 차가 없어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그룹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고모리 회장은 1년 뒤인 2004년 창업 70주년을 맞아 필름 사업에 대한 과감한 구조조정을 선언했다. 여전히 필름 매출이 전체의 20%에 육박하던 때였다. 필름과 관련된 사업까지 합하면 절반에 가까웠다.
후지필름은 2004년 한 해에만 사내 필름 관련 인원 5000명을 구조조정했다. 물론 갈등과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고모리 회장이 직접 사내방송과 인트라넷에 출연해 현재 상황과 구조조정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큰 문제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고 아오키 팀장은 전했다.
○원천 기술 바탕으로 신사업 발굴
고모리 회장은 구조조정과 함께 필름 사업을 더 깊게 분석해 보라고 임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아오키 팀장은 “70년 넘게 각종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발해 온 필름 안에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후지필름 연구진은 일단 필름이 어디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살폈다. 마침 열리기 시작한 LCD TV 시장이 눈에 띄었다. LCD TV에는 편광판이라는 부품이 필요한데, 이 속에는 색상을 조정해주는 ‘TAC(tri-acetyl-cellulose) 필름’이 반드시 들어간다. 구조가 카메라용 필름과 비슷했다. 고모리 회장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2005년 1500억엔(약 1조4000억원)을 한번에 투자했다. 현재 후지필름은 세계 TAC필름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세계 1, 2위 LCD TV 업체인 삼성전자, LG전자는 TAC필름을 전량 수입한다. 후지필름이 삼성전자와 LG전자에 상당량을 납품하고 있다는 얘기다.
필름의 소재에도 주목했다. 필름의 원재료는 콜라겐이다.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는 콜라겐은 화장품에 많이 쓰인다. 70년 이상 콜라겐 합성물을 만든 후지필름은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관련 기술을 잘 알았다. 이를 활용해 화장품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고모리 회장은 의약품 시장 진출도 결정했다. 필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20만개 이상의 화학성분을 합성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약품은 사람 몸에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학 기술만으로는 만들 수 없었다. 고모리 회장은 과감한 인수합병(M&A)을 추진했다. 2000년 이후 M&A에만 7000억엔을 쏟아부었다. 2008년엔 적자투성이였던 제약기업 도야마화학공업에 1400억엔을 베팅해 주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사를 통해 에볼라 치료제 등 혁신적인 의약품을 내놓자 최근에는 거꾸로 “선견지명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후지필름은 올해 화장품과 의약품 부문에서 4000억엔 규모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고모리 회장은 의약품에서만 “2020년까지 매출 1조엔을 달성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지속적인 구조조정 추진
살아나는 듯 보였던 후지필름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다시 실적이 악화됐다. 고모리 회장은 이때 ‘혁신을 통한 가치’라는 새로운 기업비전을 내걸고 또다시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국내 비중을 크게 줄이고 ‘신흥국 전략실’을 만들어 핵심 인재를 대규모로 파견했다. 덕분에 현재 후지필름의 해외 매출 비중은 60%가 넘는다.
결국 필름이라는 제품 자체가 시장에서 사라졌고, 세계 1위였던 코닥필름이 2012년 파산신청을 했지만 후지필름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2000년 1조4000억엔 정도였던 매출은 올해 2조4000억엔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여전히 많은 일본 기업은 내수시장에 머물고 있고 일본 직장인들도 ‘평생 직장’에 갇혀 있다. 하지만 후지필름은 일본 기업의 이 같은 틀을 벗어던지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최고의 원천기술에 ‘혁신 DNA’가 합쳐진 후지필름은 외국 기업들이 따라가기 힘든 독보적인 미래 먹거리를 창출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쿄=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