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권위의 상징
65년만에 고국 품으로
‘왕실의 도장’은 왕권과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한 나라의 국격이 압축돼 있다. 특히 국왕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에서 그 존재 가치는 매우 크고 후대에는 문화재로서 국보(國寶)로 전해진다. 왕실의 도장은 그 쓰임에 따라 ‘국새’와 ‘어보’라 칭한다. ‘국새(國璽)’는 왕위 계승, 세자 책봉의 전표로 반드시 국새가 찍혀야만 외교 문서에 효력이 발생하는 등 중요한 나랏일에 사용된다. 왕과 왕비의 개인적인 인장은 ‘어보(御寶)’다. 국새와 어보는 자주독립 국가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올해 3월 말, 해외로 반출됐던 덕종어보가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문정왕후·현종 어보도 반환 절차가 종료되는 대로 환수될 예정이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에 왕실문화를 재조명할 수 있는 어보의 귀환이 더욱 뜻깊다.
세조의 장남, 덕종의 어보 환수
세조의 장남이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덕종(1438~1457)의 어보가 미국에서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미국 시애틀미술관이 소장한 덕종어보를 3월 말에 환수한다고 밝혔다. 덕종어보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재위 2년(1471)에 아버지 덕종을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추존하면서 만든 도장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종묘 영녕전 책보록’에 1924년까지 서울 종묘에 보관됐다는 기록이 있어 그 후 해외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인 수집가 토머스 스팀슨이 1962년 뉴욕에서 사들여 이듬해 2월 1일 시애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에 압수돼 있는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어보도 환수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반환될 예정이다.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어보는 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불법 반출한 것으로 2000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LACMA) 측이 경매시장에서 구입해 소장해왔다.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으로, 도장을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라고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정왕후 어보는 조선왕실의 위풍당당하고 굳건한 기상을 잘 나타내는 조선 전기의 어보 진품”이라고 평가했다.
왕과 왕비의 개인적 인장
어보는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 왕과 왕비의 책봉 의식이 치러질 때나 그들의 덕을 찬양하기 위한 왕실 행사 때마다 제작된다. 왕과 왕비의 사후에는 왕가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 어보를 함께 묻는다. 왕과 왕비의 개인적인 인장으로, 세는 단위는 ‘과(顆)’이다. 국새와 어보는 濫퓽?도장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국새는 각종 행정문서 등 임금의 집무용 또는 대외적으로만 사용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어보는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에서 시호·존호·휘호를 올릴 때 제작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을 수 있다. 단, 왕과 왕비의 도장은 보(寶), 왕세자와 세자빈의 것은 인(印)이라 칭했다.
어보는 거북이나 용 장식을 비롯해 어보를 넣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을 넣는 외함인 보록(寶), 어보·보통과 보록을 싸는 보자기와 이를 묶는 끈 등 최소 6개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한 묶음으로 이뤄진다. 또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방형(方形)의 보신(寶身)과 거북이·용 등이 조각된 보뉴로 구성돼 있다. 보신의 바닥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보면(寶面)이라 한다. 어보의 손잡이는 거북형이 대다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몸통은 여전히 거북이지만 거북의 머리가 용두형으로 점차 변형된다.
왕위 계승의 징표 ‘국새’
어보와 국새는 용도에서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낸다. 어보가 의례용이자 왕과 왕비의 개인적인 인장이라면, 국새는 실무용 왕실 인장이다. 사대 교린의 외교 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된다. 왕위 계승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돼 국왕의 전통성을 과시한다. 각종 왕의 행차 시에는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행렬의 맨 앞에 앞장선다. 국새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신라 2대 남해 차차웅 16년’조에 실려 있다. “북명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濊王印)’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에서도 165년 7대 차대왕이 시해되자 신하들이 왕의 아들을 놔두고 동생 신대왕에게 국새를 바쳤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고구려 때부터 국새의 전수를 통해 왕위 선량의 전통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들어오면서 중국으로부터 인장을 받아 이것을 국새로 사용했다. 고려 국새의 손잡이 모양은 낙타와 거북 두 종류였다. 낙타는 동북방의 민족을 지칭하고 거북은 신하의 도리를 내포하고 있어 사대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이후 황제국을 천명한 대한제국에서는 용 모양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현재 사용 중인 대한민국 5대 국새는 꽃잎을 등에 얹은 금빛 봉황 모습으로 ‘대한민국’ 글자를 가로로 새겼다.
귀향 못한 우리 문화재 15만점
해외에서 환수된 문화재는 현재까지 1만여점이다. 하지만 아직도 각국에 흩어져 귀향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가 15만여점이 넘는다. 특히 일본은 일제강점기(1910~1945년)에 우리 문화재 6만6000여점을 강탈했다. 1965년 12월 비준된 한·일협정의 4개 부속협정 중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강탈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환수 목록을 만들어 제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 내) 한국 문화재는 모두 정당한 수단에 의한 입수물”이라며 반환하지 않았다. 이후 정부 간 협상에 의해 반환된 문화재는 1432점으로, 애초 요구한 규모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근·현대 혼란기에 잃어버린 국새 29과(顆·인장을 세는 단위)는 아직 소재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대한제국기까지 현존하던 국새는 모두 37과(조선시대 12과, 개화기 12과, 대한제국기 13과)다. 이들 국새 중 조선시대 국새는 2과, 개화기는 1과, 대한제국기는 5과만이 남아 있다. 사라진 국새들은 대한제국이 종언을 고한 1910년 이후 분실됐으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내외로 흩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정희 연구원 jhson@hankyung.com
장두원 인턴기자(연세대 국문 2) seigicha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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