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피해자들이 경찰에게 원하는 건…빠른 수사보다 아픔 나누는 '공감'

입력 2015-02-28 09:05
피해자 보호 선포 원년…전담반 경찰관 24시

미술치료 등 전문가 포진…성범죄 피해자와 그림 '소통'
이야기 진심으로 들어주면 굳게 닫힌 마음의 문 열려


[ 김태호 기자 ]
지난 25일 세종시 장군면 금암리의 한 편의점 인근에서 ‘엽총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옛 동거녀와 돈 문제로 갈등을 빚던 한 남성이 옛 동거녀의 가족 등에게 엽총을 쏴 3명이 살해됐다. 범인은 편의점에 불을 지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경찰의 역할이 끝난 건 아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나머지 가족을 돌보는 일이 남아 있다. 충격을 딛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범행 당시 평택에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던 범인의 전 동거녀는 사건 충격으로 제대로 진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찰은 이 같은 범죄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전담경찰관’을 지정, 이들의 심리적 안정과 회복을 돕고 있다.

각종 범죄 사건은 범인이 검거되면 종결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피해湄湧?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경찰이 창설 70주년인 올해를 ‘피해자 보호 원년’으로 선포한 이유다. 지난 12일엔 강신명 경찰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피해자전담경찰관’ 발대식을 열었다. 상담전문가 미술치료사 수사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209명의 피해자전담경찰관은 경찰청은 물론 지방경찰청과 일선 경찰서 등에 배치돼 전문적인 보호·지원·상담·연계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제공한다.

경기 안산에서 부인의 전 남편과 의붓딸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수원 팔달산 토막 살인사건 등과 관련된 피해자를 돌보는 일도 이들의 역할이다.

강 청장 “피해자 보호의 원년”

범죄 피해자 보호를 위한 경찰의 역할 강화는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한 경찰서의 형사과장은 “범인 검거에 집중하다 보니 피해자 보호가 미흡한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형사들은 범인 검거에 집중하고 피해자는 전담 경찰관이 맡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피해자전담경찰관 출범은 현장의 요구에 강 청장이 화답한 결과물이다. 강 청장은 지난해 동네 조폭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보복 등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찰 내부의 혁신 태스크포스(TF)인 새경찰추진단을 중심으로 피해자 보호를 위한 조직 신설과 역할 강화를 추진하도록 한 데 이어 올초에는 서울지방경찰청에 소속된 ‘범죄 피해자 긴급 보호센터’도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결과 경찰청에 피해자보호전담관실이 신설돼 그동안 수사부서 등에서 별도로 담당했던 피해자 관리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맡게 됐다. 전담 경찰관이 파견돼 활동하기 시작했다.

강 청장은 “범죄 피해자를 가장 먼저 접하고 피해자 보호의 골든타임을 담당하는 경찰이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며 “모든 경찰관은 피해자 보호가 경찰의 기본 임무임을 깊이 인식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피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애 경찰청 피해자기획계장은 “피해자들이 바라는 것은 신속한 수사보다 경찰이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공감’일 수 있다”며 “전담 경찰관들은 상담을 통한 정신적 보살핌과 지원 제도를 활용한 물질적 관리를 더욱 전문적으로 제공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치료 등 상담 전문가 배치

현재 피해자전담경찰관으로 활동 중인 경찰들의 이력은 다양하다. 상담 전문가에서부터 수사 전문가까지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피해자의 숨은 아픔까지 찾아내겠다는 의도다. 피해자전담경찰관에 선발된 인력 가운데 66명(33.5%)의 경찰관은 피해상담사 등 심리상담 관련 자격증을 한 개 이상 갖고 있다. 65명(32.5%)은 주로 피해자를 상담한 경험이 풍부한 수사부서 경력자다.

박성인 충남지방경찰청 피해자보호팀 경사는 최근 ‘세종시 엽총 살인사건’의 피해자 보호를 담당하고 있다. 박 경사는 미술심리치료 자격증을 갖고 있다. 그는 “수사 부서에서 효과적인 피해자 상담을 고민하던 중 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하게 됐다”며 “범죄로 인한 상처 등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소통하면 마음의 문을 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머리카락을 유독 진하게 그리는 사람은 성범죄 피해자일 가능성이 커 그림을 본 뒤 ‘혹시 이런 피해가 있었느냐’며 대화를 유도하는 식이다.

서울 강남경찰서 피해자전담경찰관인 김미라 경위는 최근 KICS(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올라오는 각종 사건사고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눈여겨보지 못했던 사건 가운데 피해자의 고통이 컸을 사건을 찾아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다. 심리상담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김 경위는 그동안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경찰 원스톱센터에서 근무하며 축적한 상담 경험도 많은 편이다.

홍승일 경기지방경찰청 피해자보호팀 경사는 피해자전담경찰관 사이에서 베테랑으로 불린다.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병원 신경정신과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2007년 ‘피해자 케어 요원’으로 경찰에 들어와 지금까지 안산 인질범 사건 등을 비롯 경기청 관할의 강력범죄 대부분에 파견돼 피해자 상담을 진행했다.

조직은 만들었지만 예산은 부족

피해자 보호를 위한 조직은 갖춰졌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경찰의 불만이다. 올해 경찰청이 확보한 피해자 보호와 관련된 예산은 거의 없다. 범죄피해자보호법에 근거해 조성된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의 90% 이상을 법무부와 여성가족부가 쓰고 있다. 경찰청은 법무부로부터 3억원 정도를 지원받았지만, 여가부가 올해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에 사용하는 예산 495억원에 비하면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김태호 기자 highk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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