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지음 / 옥당 / 336쪽 / 1만6000원
[ 서화동 기자 ]
‘부왕(父王) 때 양정(兩鄭)이라고 일컬었으니, 한 사람은 정몽주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정몽주는 왕씨(王氏) 말년에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해 있는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길이 모두 옳은 것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당대의 두 지식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것으로 ‘태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양정’의 역할은 확연히 달랐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 정도전은 조선을 유교적 합리주의와 민본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제도를 정비한 개국 일등공신이다.
그런데 왕실의 사당인 종묘와 함께 유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인 문묘(文廟)에는 정몽주가 모셔져 있고 정도전은 빠져 있다. 왜 그럴까.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조선의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배향되는 과정을 다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개별 지식인들의 삶과 학문 세계를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대신 문묘종사의 대상자가 선정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치적 역학관계에 주목한다. 정치학 전공자다운 시각이다.
고려인 정몽주가 조선 지식인의 상징이 된 것은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 반정이다.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정몽주에 대한 동정심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와 충성심에 대한 평가는 계속 주목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중종 12년 문묘에 배향된 조선의 첫 인물이 됐다. 연산군의 폭정을 끝낸 뒤 반정의 시대정신을 대변할 지식인으로 정몽주가 선정된 것이다. 저자는 “조선 지식계보의 탄생이 신성한 도덕적 기원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조선 태조는 종묘를 완공한 뒤 문묘 건립을 서둘러 태조 7년(1398년)에 완공했다. 당시 조선의 문묘에는 고려 때 결정된 설총, 최치원, 안향만 종사(從祀·배향)돼 있어 조선의 정신을 대표할 새로운 문묘 종사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헌부는 문묘종사에 합당한 학문과 도덕, 정치적 업적 등의 기준을 제시했다.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추진한 주역은 조광조와 그 추종세력이었다. 정몽주의 문묘종사가 성사되자 조광조를 중심으로 도학의 계보를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 김굉필과 조광조에게 계승됐다는 것. 하지만 길재, 김숙자, 김종직은 끝내 문묘에 종사되지 못했다. 대신 정몽주의 문묘종사로부터 93년 뒤인 광해군 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이른바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됐다.
5현의 문묘종사로 조선에서 지식권력의 시대가 열렸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남인 중심 지식권력이어서 대표성에 한계가 있었고 인조반정으로 서인세력이 집권하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의 경쟁과 견제, 왕권에 대한 압박이 적나라하게 표출됐고 숙종 때에 와서야 문묘종사가 허용됐다. 이로써 이황 중심의 남인 학맥과 이이 중심의 서인 학맥이 국가가 공인하는 조선 지식계보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김인후,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을 포함해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이뤄진 문묘종사의 과정은 예외 없이 학문적 업적이나 도덕성과 별개로 정치 지형과 맞물려 전개됐다. 저자는 “조선의 문묘종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 선정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라며 “지식인들의 진정한 토론이 살아있어야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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