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입력 2015-02-06 17:27
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6)

(4) 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7)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9) 실크로드의 끝에 신라가 있다



491년, 당시 중국 화북 지역을 차지한 국가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여름 북위의 왕 효문제는 흰 관을 쓰고 상복을 입은 후 한 인물의 죽음을 깊이 슬퍼합니다. 그 인물은 바로 고구려 제20대 왕이자 광개토태왕의 맏아들 장수왕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98세까지 장수하였으며, 재위 기간만 무려 78년이었어요. 단, 그는 단지 오래 살기만 한 왕은 아닙니다. 앞서 중국의 왕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서 아버지 광개토태왕 못지않게 고구려의 국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왕이기도 했지요. 사실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통치력을 보이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장수왕은 아버지와 또 다른 방식으로 고구려를 통치하며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 성공의 열쇠는 바로 ‘외교술’이었습니다.

뛰어난 외교술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누리다

장수왕이 통치하던 5세기의 동아시아 정세는 앞선 시기와 사뭇 달랐습니다. 북방 유목 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한족 국가를 무너뜨리고 서로 왕이 되기 위해 싸우던 시기(16국 시대)가 이제 좀 정리가 됩니다. 황허강 중심의 화북 지역은 선비족인 북위가 있었으며, 양쯔강 이남에는 한족 국가가 있는 이른바 ‘남북조’의 대립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 자체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지요. 이 긴장 속에 만약 동쪽에서 누군가 공격을 감행한다거나 다른 한쪽과 협공을 퍼붓는다면 곧 나머지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즉, 이 대립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요동 지역을 확보하고 만주 대부분을 차지했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중국 북조와 남조 모두 고구려가 계속해서 부담이 되므로 차라리 먼저 쳐서 없애야 후환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장수왕은 먼저 상대방을 안심시키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성 백제를 무너뜨린 장수왕

이러한 외교술로 장수왕은 중국 북조와 남조 모두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조공이라고 하면 언뜻 굴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통해 특산물을 보내고, 그들로부터도 많은 답례품과 함께 형식적인 벼슬을 받는 것일 뿐, 엄연히 독자적 국가로 존재하며 영토 지배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일종의 외교 전술이었습니다. 이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의례적인 외교 관계로, 고구려는 당시 중국 남북조의 대립을 역이용한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는 북위와 더욱 친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제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합니다.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깁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의미가 담겨 있었는데요. 첫째, 기존 국내성의 귀족 세력을 확실하게 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한다는 것이지요. 그 압박은 대단하여 곧 백제와 신라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나제동맹’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고구려의 막강한 기세를 꺾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장수왕은 454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475년에는 직접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백제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였으며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 전에 백제 개로왕은 다급하게 중국 북위에 국서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고구려와 쌓은 돈독한 외교 관계를 생각하여 단칼에 거절합니다. 결국 개로왕은 한강 유역의 아차산성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살아남은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훗날을 기약하며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한편 장수왕은 계속 신라마저 압박하여 더욱 고구려의 영토를 늘리게 됩니다.

반격의 서막, 나제 동맹이 추진되다

그로부터 약 1500년 뒤 남한강 유역의 충주시에 마모가 심한 채로 남아 있던 한 비석이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됩니다. 높이 약 2m, 너비 55㎝의 이 비석에는 희미하지만 고구려를 뜻하는 ‘고려(高麗)’라는 글자와 ‘대사자(大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남아 있었어요. 이를 통해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5세기에 바로 이곳 남한강 유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비석이 바로 현재 국보 205호로 지정된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다만, 이것이 장수왕 때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 바로 다음인 문자왕 때인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외에도 오늘날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터 주변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부뚜막이나 시루와 솥 등이 발견되었어요. 백제 입장에서는 원통한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로 답사를 가지 않더라도 고구려인의 흔적을 충분히 직접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을 통해 최전성기를 이룬 고구려가 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을까?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장수왕 앞에서 힘도 못 쓰던 ‘나제동맹’이 오히려 이때를 계기로 역설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닐까라고 봅니다. 그리고 6세기에 이 나제동맹을 적극 활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백제가 아닌 신라가 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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