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11)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우리는 국가가 우리에게 직업, 복지, 교육, 소득, 좋은 가정을 주는 유토피아의 세상을 갈망하는 버릇이 있다. 오랫동안 왕조-식민지-권위주의를 거치며 개인보다 집단과 국가를 더 중시하는 역사적 경험이 많은 한국에서 더욱 그러하다. 국가가 정말 그런 것을 줄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주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국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민주인가? 복지인가? 자유인가?
자유는 기본권 중 가장 먼저 확립된 가치이다. 그런데 그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은 과거와 같은 식민국가나 군주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20세기 이탈리아, 러시아 및 독일에서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파괴해 갔는가를 논증한 후, 서구 사회가 부지불식 간에 이를 추종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자유의 본래적 의미는 소극적인 것, 즉 “~로부터의 자유”이며, 개인이 외부 특히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의 적극적 조치를 통해서 어떤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개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돈을 벌기보다는 국가가 당장 돈을 주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직접 개입하면 당장 경제적 성과가 좋아 보일 수도 있다. 히틀러 치하의 계획경제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히틀러 이전의 독일 사회는 점차 자유주의를 버렸고 그 자리를 사회주의가 차지하게 되었다.
흔히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상극이 나치즘, 파시즘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나치즘의 본질은 바로 사회주의이다. 나치란 말 자체가 국가사회주의이며 자유주의와는 결코 결합될 수 없다. 그런데도 나치즘이 마치 개인에게 새로운 자유를 실현해 주는 ‘위대한 유토피아(Great Utopia)’로 기만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가 시대적 추세일 때는 ‘민주적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교묘히 자신을 분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본질상 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이며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회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새 자유(New Freedom)’란 말을 내세웠다. 그것은 물질적 궁핍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본래의 말뜻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물질적 궁핍을 해결할 만한 큰 부(富)를 창출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실은 부의 평등 분배를 의미했다. 이렇게 본래 자유주의와는 상극이던 사회주의가 개인을 속이기 위해 자유주의 이름(새 자유)으로 포장되었고 이것이 새 자유를 줄 것이라고 속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유의 길이 아니라 노예의 길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사유재산 제도는 자유에 불가결하며, 재산이 있는 자는 물론이며 없는 자에게도 자유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개인들에게 사유재산권이 주어진 곳에서는, 설령 한 독점기업에 모든 재산권이 다 주어진 경우라도, 사유 재산권을 장악한 국가 공무원의 재량에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준다는 환상은 상당한 마력을 주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절차란 대개 느리게 보인다. 이때 신속히 문제를 해결하라는 군중의 요구 때문에 전체주의가 대두한다. 능률적으로 보이는 이 전체주의가 요행히 선한 사람들로 구성될 수는 없을까? 없다.
전체주의는 사회 최악의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독재자로서는 교육과 지식이 높은 사람들보다 도덕적, 지적 수준이 한참 낮은 사람들, 비이성적이고 격정에 쉽게 선동되는 사람들, 부자에 대한 시기심 및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저급한 인간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인민재판의 군중, 문화혁명의 홍위병, 개인을 협박하는 광기어린 시위 군중이란 이런 부류들이다. 정신 차려라, 한국 사회여! 자유 사회와는 양립될 수 없는 그런 전체주의 정책들을 왜 모방하려는가!
이 책 이래서 권합니다
읽는 고통을 이겨내면 ‘노예의 길’이 아니라 ‘자유의 길’을 알 수 있을 것
오늘날 공산주의는 붕괴했고 중국마저 시장주의로 돌아섰으며 한국은 시련을 거쳐 모범적 민주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를 노예의 길로 끌고 갈 위험은 사라진 것일까? 천만에.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주의, 전체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많은 규제 법규를 양산하는 무제한의 입법 권력(형식적 법치주의)과, 사회복지분배정의경제민주화의 유토피아를 국가를 통해 이룩하겠다는 태평천국식 국가주의와, 일부 사람들을 여전히 현혹하는 시대착오적 북한식 세습 공산주의로 다가오고 있다. 90년 전 독일도 대개 이렇게 출발했다. 오늘날 자유의 적은 강제와 폭력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달콤한 복지와 위대한 유토피아로 변장해 있다.
하이에크는 한국 사회에 부르짖고 있다. 어느 새 당신들은 사회주의자들로 변모해 가고 있지 않은가? 유토피아에 현혹되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려는가? 그 길은 노예의 길이다.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하이에크가 쓴 책을 들고 다니며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물론 편안히 읽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읽는 고통을 이겨낸 사람에겐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다.
김행범 < 부산대 교수·행정학 >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