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里 물줄기의 리장·물안개 품은 샹공산…신이 그린 수묵화 구이린

입력 2014-12-29 07:01

신이 그린 수묵화 속에서 여행자는 길을 찾고 시간은 길을 잃었다. 구이린(桂林·계림)에서 나그네의 눈길을 먼저 사로잡는 것은 계수나무가 아니라 수만개의 산봉우리다. 평지에서 솟구친 산봉우리들이 허공 중에 오글오글하다. 하지만 그 많은 산봉우리 중 어느 한 곳도 다툼의 흔적은 없다. 산봉우리들은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며 어깨동무를 한 채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만 같다.

야오산에서 관암동굴로

구이린의 명성을 어림하기 위해 일단 야오산(堯山)에 오르기로 한다. 하지만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고온다습한 기후에다 강을 끼고 있는 탓에 안개는 다반사라고 하니 어쩌랴. 이것이 구이린의 민낯이라지 않는가. 마음을 느긋이 하고 구이린의 민낯과 마주하기로 한다. 리프트를 타고 야오산에서 내려오면 기암괴석의 콴얀(冠岩)동굴이 기다린다. 카르스트 지형의 영향으로 생성된 콴얀동굴은 총 12㎞에 이르며, 동굴의 물은 리장과 연결돼 있다. 모노레일과 유람선, 엘리베이터를 고루 갖추어 자칫 피로하기 쉬운 여행에서도 동굴여행은 몸도 마음도 함께 즐겁다.

동굴을 빠져나오면 미니열차가 기다린다. 탑승자의 수동 조작으로 운행하는 열차에 앉아 늦가을 숲속을 달리는데 저만치 앞서 가던 열차에서 웃음소리가 물방울처럼 튄다.

해질녘의 리장, 피안의 풍경화

해질녘의 구이린에서 물안개에 감싸인 샹공산(相公山)을 바라보는 것은 경이롭다. 신이 그린 최고의 수묵화에다 배를 띄우는 순간 여행자 역시 그대로 그림 속의 풍경이 된다. 인간과 자연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시간은 길을 잃는다.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상공산의 정경과 멀리 건너다 보이는 이름 없는 산봉우리들에 에워싸인 리장에서 누구는 여행자이고, 또 누군가는 고기잡이를 한다. 웃통을 벗어던진 채 힘겹게 그물을 말아 올리는 어부의 삶조차 여행자에게는 그림 같다.

수묵화의 명장면, 샹공산에서 바라본 리장

구이린 양숴(陽朔·양삭) 여행의 핵심은 샹공산이다. 샹공산은 구이린에서 양숴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동선 또한 절묘하다.

샹공산 전망대에 오르니 어제 해질녘에 보았던 리장이 산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리장은 일군의 산을 포위하듯 흐르고 수만개의 산봉우리들이 100리 물줄기를 자랑하는 리장을 또 한 차례 아우르며 그 위용을 더한다.

또 있다. 구이린의 산수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 빼곡히 들어찬 산봉우리들 사이로 넉넉히 열려 있는 듯한 여백의 느낌은 무슨 조화 속일까. 문득 창조주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구이린을 그릴 때 신의 마음이 한껏 여유로웠던 게 아닐까. 창조를 끝내고 쉬는 날, 그야말로 쉬면서 여기(餘技)로 그린 신의 그림이 바로 구이린이 아닐까.

명불허전의 ‘계림산수갑천하’

구이린 양숴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는 야경과 공연이다. 리장과 도화강(桃花江), 그리고 4개의 인공호수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구이린 양숴의 밤은 매혹적으로 변신한다.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변신한 자연을 무대로 수백명의 출연진이 펼치는 공연은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리장의 환상적인 야경 역시 여행자의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인간의 재주가 신을 넘볼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 또한 놀라운 재주를 가졌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경치를 무대로 한 계림의 공연과 야경이다.

오고 가는 시간을 뺀 만 사흘의 일정 중에 장족마을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짧은 일정을 감안하면 구이린이라는, 신이 그린 최고의 수묵화를 마음의 화폭에 옮겨온 것만으로도 구이린 양숴에서의 며칠은 충분히 족하다. 그림 밖으로 나오듯이 구이린을 떠날 때는 마음에 새로이 생긴 길 하나를 발견한다. 그 길의 이름은 여백이다.

안성교 여행작가 ask7749@naver.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