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가방 모찌'는 옛말…해외박사 수두룩
공무원·기업인에겐 의원만큼 무서운…그림자 甲
5급 비서관 공채에 100여명…명문대 출신·전문직도 몰려
부처 공무원 마음에 안들면 수백건 자료요청 '폭탄' 던져
"20代 인턴이 호출해 술 접대"
[ 이호기 / 이태훈 / 고재연 기자 ] 최근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청와대 비선 실세’ 파문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정윤회 씨와 일명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일 때 보좌진(보좌관 비서관)으로 일했다. 한 여당 인사는 “18대 국회 때 친박계(친박근혜계) 핵심인 A의원과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막 달려가더라. 당시 문고리 권력 3인방 가운데 한 명이 손짓하고 있었다”며 “일개 보좌관이 현역 의원을 ‘오라 가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비단 거물급 정치인 보좌관뿐만 아니라 ‘평범한’ 의원 보좌관도 정가와 관가에선 ‘그림자 실세’로 통한다. 의원을 대리해 정부기관으로부터 각종 보고를 받고 자료를 분석한다. 국정감사 때 ‘한방’ 터뜨리는 의원들의 뒤에는 이들이 있다. 그만큼 이들의 파워도 커질 수밖에 없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한 의원 보좌관은 “중앙부처 1급 정도까지는 부를 수 있다”며 “예산안 심사 때마다 각 부처 실·국장이 보좌관과 5분간 면담하기 위해 의원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서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보좌관의 ‘스펙’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다. 옛 ‘가방모찌(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 수준을 벗어나 법률·경제 등 각 분야별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특수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중진 B의원은 최근 자리가 빈 4급 보좌관 1명을 뽑기 위해 채용 공고를 냈다가 깜짝 놀랐다. 약 열흘간 진행된 공채 접수에서 70명에 달하는 지원자가 몰렸다. 그중에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국내 명문대는 기본이고 미국 스탠퍼드대 등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지원자가 수두룩했다. 변호사 등 전문직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도 10여명이나 됐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언론사 부장급 이상 경력자도 적지 않았다. B의원 측은 “예상보다 고학력 전문직 출신 지원자가 많아 누굴 뽑아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4선 중진인 원유철 새누리당 의원이 실시한 5급 비서관 공채에서도 120여명의 지원자가 몰려 화제가 됐다. 100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한 사람은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이철호 비서관(37). 이 비서관은 “최근 의회 간 외교의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해외 경험이 국회의원 의정 활동을 돕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보좌관·비서관 채용뿐만 아니라 인턴 직원을 뽑을 때도 해외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몰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지낸 이준석 클라셰스튜디오 대표도 미국 하버드대 재학 시절인 2004년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야당 간사인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의 정한모 보좌관(41)은 ‘통상 전문가’로 손꼽힌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농촌경제연구원을 거쳐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사무관으로 특채됐던 그는 이후 청와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지원위원회, 옛 외교통상부 등에서 통상 업무만 10년 가까이 했다. 청와대 근무 시절 인연을 맺은 홍 의원의 요청으로 2010년 임용된 정 보좌관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해외 자원외교 실패 사례를 다수 발굴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정 보좌관은 “국회로 올 당시 안정적인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에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며 “보좌관도 전문지식으로 승부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소관부처 공무원이나 기업체 직원에게 ‘슈퍼 갑’인 국회 보좌관이 이른바 ‘갑질’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새누리당에서 20년간 보좌관 생활을 한 C씨는 부처 공무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요일에 100여건의 자료 요청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면 담당 공무원은 자료를 만드느라 휴일에도 출근해야 한다. 법으로 보장된 국회의원의 대정부 자료 제출 요구권을 악용한 것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초선 의원은 평소 장·차관 등에게 “우리 D보좌관 악명 높은 것 알죠”란 협박성(?) 발언을 자주 한다. 박사 학위 소지자로 대학 강사 생활도 한 D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공손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소관부처 공무원에게만큼은 ‘악덕 보좌관’으로 통한다.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이 발견되면 담당 실·국장은 물론 차관에게까지 직접 전화해 호통치곤 한다.
대기업에서 국회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E씨는 퇴근 후 집에 있다가 한 의원실 인턴의 호출을 받아 한밤중에 다시 여의도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한 노래주점. 여러 의원실에서 근무하는 20대 젊은 인턴들이 모여 있었다. 꼼짝없이 술값을 대신 계산해줬다.
김한길 전 새정치연합 대표의 의원실에서 잠시 보좌관을 지낸 김진욱 새정치연합 상근부대변인(정치학 박사)은 “1998년과 2010년 각각 4급 보좌관과 5급 비서관 정원이 1명에서 2명씩으로 늘어나면서 정무와 정책 기능을 분리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의 지원도 급격히 늘었다”고 설명했다. 김 부대변인은 또 “보좌관들이 높아진 위상만큼 스스로 자기 규율과 절제에 보다 신경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호기/이태훈/고재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