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프런티어 시대, 전문대에 길을 묻다] '컨베이어→셀' 생산혁신 김영순 롯데알미늄 대표…전문대 출신 CEO 되기까지

입력 2014-12-18 08:16
수정 2015-08-30 22:17
⑧김영순 롯데알미늄 대표(인하공전 전자공학과 졸)
삼성·LG도 벤치마킹 … 'IMF 맞아 위기를 기회로'
"입사 땐 '전문대졸' 벽 있어도 회사 다닐 땐 없다"


지식경제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은 '간판보다 실력'입니다. 안전제일 직업관을 벗어던지고, 청년층이 잡프런티어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로의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경닷컴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전문 지식인과 맞춤형 전문대 교육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영순 롯데알미늄 대표(59·사진)는 손꼽히는 ‘셀(cell: 세포·단위) 생산방식’ 혁신 전문가다. 기존 컨베이어 방식을 벗어던지고 셀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 회장도 직접 공장을 찾아 벤치마킹할 만큼 주목받았다.

김 대표는 프린터와 복사기, 복합기 등을 생산하는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캐논코리아) 안산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제조부장, 생산본부장, 전무를 거치며 셀 방식을 정착시킨 뒤 지난해 롯데알미늄과 롯데기공 대표로 명함을 바꿨다.

“한 사람이 다 만들면 어떨까? 이게 셀의 기본 개념입니다. 기존엔 100m가 넘는 컨베이어 벨트에 80명이 달라붙었죠. 단순반복 작업을 계속 해야 되는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거든요. 숙련도에 따라 불량이 나고, 생산 라인 한 번 돌릴 때마다 80대가 생산돼 재고 관리도 안 됐죠.”

인천 주안국가산업단지의 롯데기공 공장에서 만난 그는 셀 혁신을 ‘부품’과 ‘장인’의 차이로 설명했다. 컨베이어 방식에선 일종의 부품에 그친 직원들이 셀 방식을 통해 1000~2000개의 부품을 한 명이 조립·생산하는 장인으로 거듭났다. 결과는 놀라웠다. 생산 인원이 2배 늘어난 데 비해 품질은 10배 좋아졌고 생산량은 20배 증가했다.

IMF 위기를 오히려 혁신의 기회로 생각한 발상의 전환이 제대로 먹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전문대(인하공업전문대학 전자공학과)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기업 계열사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랐다. 올해의 ‘자랑스러운 전문대학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입사할 땐 출신 학교를 따집니다. 벽이 있어요. 하지만 회사 다닐 때도 그런가요. 아니죠. 출신 학교가 아니라 누가 빨리 뛰고 열심히 하는지를 보죠. 고졸이나 전문대 출신 직원들이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학력 탓으로 돌리곤 하는데요. 저는 늘 얘기합니다. 회사가 정말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대표이사가 됐겠느냐’고요. 열등감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인하공전을 졸업했다. 전문대를 택한 이유는.

“사실 대학에 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한양공고 전자과를 나왔다. 고교 시절엔 기능올림픽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고교 졸업 후 기술자로 사회생활 하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고3 때 동양정밀에 취업했다. 당시 엔지니어들에겐 삼성전자나 LG전자보다 선호하는 곳이었다. 1년 반 정도 일하다가 인생의 멘토 같은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공부를 더 하라고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그분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원래 대학 진학에 관심 없었던 터라 대입 예비고사를 언제 치르는지도 몰랐다. 공장을 그만두고 나니 예비고사가 끝난 시점이더라고. (웃음) 1970년대 당시엔 국가적으로 전자공학을 키웠다. 나도 계속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내 전문대 전자공학과 중에 좋은 곳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인하공전에 들어갔다.”

- 같은 학과 출신인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광운대 전자공학과 편입)과도 알았나.

“학교 땐 잘 몰랐다. 최근 삼성 구미 공장에서 만나 인사했다. 캐논코리아 안산 공장 있을 때 삼성이 셀 생산방식에 관심 있어 찾아오면서 몇 번 만나기도 했다. 컨베이어 방식보다 훨씬 성과를 많이 냈기 때문에 삼성전자, LG전자가 벤치마킹하러 왔었다.”

- 당시엔 공고나 전문대도 상당히 인정받았는데.

“그렇다. 그땐 공고나 전문대만 졸업해도 국가 기술자격증을 따면 취업도 수월했고 인정도 받았다. 물론 입사 후엔 4년제 졸업생과 학력 차이가 있었다. 조금 더 뒤에서 출발하고, 따라가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구조라고 보면 된다.”

- 졸업 후 롯데산업에 입사했나요.

“롯데산업이 국내 최초로 팩시밀리를 생산한다고 했다. 엔지니어가 필요하다고 해서 스카우트 된 격으로 입사했다. 1982년 4월에 입사했는데 그해 9월에 ‘국내 최초로 팩시밀리 시대가 열렸다’는 내용으로 공중파 TV 9시 뉴스에도 나갔다. 그때 팩스 가격이 600만 원, 자동차 한 대 값과 맞먹었다. 당시로선 첨단기기였다. (웃음)

롯데산업이 1985년에 일본 캐논과 합작해 롯데캐논이 됐다. 이후 사명을 캐논코리아로 바꿨다. 엔지니어로 입사해 팩스나 복사기, 복합기 국산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95년에 제조부장이 돼 제조 분야를 처음 접했다. 그런데 제조 환경이 정말 열악한 거다. 품질도 그렇게 좋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한 번 바꿔보자’ 하는 상황에서 IMF 위기를 맞았다.”

- 막막했겠다. 어떻게 극복했나.

“어려운 시기였다. 생산 라인이 제대로 가동 안됐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업무에 치여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냈는데 한가로워졌으니 ‘이제 제대로 혁신해보자’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형편이 어려워 직원들 내보냈지만 나는 혁신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 그때 셀 방식을 생각한 것인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가.

“책에도 소개된 적 있는데 포장마차를 생각하면 쉽다. 포장마차는 주인이 경영, 관리, 생산, 마케팅까지 혼자 다 하는 1인 기업이다. 셀 방식도 ‘한 사람이 다 만들면 어떨까’란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 사람이 제품 생산의 첫 공정부터 최종 공정까지 온전히 담당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용하던 컨베이어 벨트의 분업 방식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당시 106m 길이의 컨베이어 벨트를 썼다. 80명이 늘어서서 일했다. 이론적으로는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 군데만 불량이 나면 라인 전체가 서 버리지 않느냐. 작업자들의 숙련도나 컨디션에 따라서도 품질이 달라졌고. 또 한 두 대 제품 주문이 와도 라인 한 번 돌리면 80대를 만들어야 했다. 70대 이상 재고가 쌓이는 문제점이 있었다.”

- 성과가 컸다고 들었다.

“소량 다품종엔 셀 방식이 적합하다. 셀 방식으로 바꾸고 난 뒤 인원은 2배 늘고 생산량은 20배 가량 늘었다. 중국보다 싸게 만든 거다. 직원 하나하나가 장인이 되니까 품질이 10배나 좋아지더라. 셀 방식으로 일하면 한 사람이 그 제품을 다 만들게 된다. 제품에 생산자의 얼굴과 전화번호를 넣은 라벨을 부착했다. 자신을 걸고 만드는 제품이니까 불량률이 확 떨어졌다.”

- IMF 때 셀 방식 혁신을 생각한 구체적 계기가 뭔지 궁금하다.

“일본 캐논과 합작하면서 일본 분들과 같이 일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의 사고나 일하는 방식, 우수한 품질을 알게 됐다. 한국에선 그 정도로 따라가지 못했다. 항상 창피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기술이 모자라서 합작한 거지, 머리가 모자라서 합작한 게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잘 적용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자고 늘 얘기했다. 셀 방식을 도입하면서 일본 캐논에도 가장 좋은 품질로 소개됐다. 뿌듯했다.

컨베이어로는 더 이상 생산을 확대할 수 없었다. 이리 저리 시뮬레이션 해봐도 당시 1만6530㎡(5000평) 규모 공장 안에 106m짜리 새 컨베이어를 놓을 공간이 안 나오더라.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셀 방식을 생각했지만 바빠서 실현을 못하다가 IMF 때 시작한 것이다.”

- 롯데알미늄과 롯데기공으로 옮겨선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캐논코리아에서도 그랬지만 대표 취임하며 ‘직원들이 제가 모셔야 할 고객이 됐다’고 말했다. ‘고객감동’ ‘고객만족’을 많이 얘기하는데, 직원들이 만족하지 않는데 고객 감동이 되겠나. 셀 방식도 단순히 생산방식 뿐 아니라 직원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직원들과 대화하고 식사하는 데 힘 쏟고 있다. 직원들이 굉장히 밝아지고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혁신전문가로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직원들이 ‘일다운 일’을 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뒀다. 롯데알미늄은 철강재 생산하는 회사라 경기를 타 성장은 못했지만 낭비 요소를 줄여 이익은 줄지 않았다. 롯데기공은 매출이 15% 이상 신장해 흑자 전환했다. 그동안의 노력을 바탕으로 내년엔 정말 임직원이 함께 성과를 내는 좋은 회사가 될 것 같다.”

- 전문대 출신으로 CEO에 오르기까지 남모르는 고충도 있었을 텐데.

“바쁘게 일해서 그런지 몰라도 학력 격차나 벽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선배로서 전문대 졸업생들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을 짚어주고 싶다. 어느 회사나 입사 땐 학력의 벽이 있다. 그런데 그건 입사할 때다. 회사 다닐 때는 아닌데, 일하면서도 계속 출신 학교를 의식한다. 그건 열등감이다. 열등감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한테 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학력 핑계를 대는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기업이든 누가 빨리 뛰고 열심히 일하느냐로 평가하지, 출신 학교를 따져 평가하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뭔가 잘 안 되면 학력 차별 탓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고졸이나 전문대 출신 직원에게 늘 얘기한다. 회사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대표이사가 될 수 있었겠느냐고.”



- 전문대 출신 CEO가 직접 말하니 설득력 있겠다.

“그렇다. 열등감은 누구나 있고 그 부분이 학력일 수도 있다. 그건 스스로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나 사회가 해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지 않나. 한 발 늦게 출발했다면 두 발, 세 발 더 빨리 가면 된다.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면 되는 문제다.”

- 전문대 출신에게도 ‘유리천장’이 있을 것 같다.

“30년 넘게 직장생활 하고 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항상 새로운 걸 찾았다. 전문대 출신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셀 방식을 처음 시도할 때도 내가 이 분야 전문가가 될 기회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나에게 최고 전문가가 될 기회를 줬다’는 것과 ‘바쁜데 왜 이런 걸 시키냐’는 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 보통 회사원과 발상이 다르다.

“지금 회사에 40년 가까운 경력의 베테랑들이 많다. 베테랑이 ‘나는 고참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이 쌓이고 진급을 하는 건 더 잘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과장 때 이렇게 해서 부장 달았으니 똑같이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내가 잘했던, 익숙한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 전문대 후배나 졸업생들에게 조언한다면.

“전문대와 4년제대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때문에 입사할 때 벽이 생기고 격차가 벌어진다.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건 ‘지혜’다. 즉 스스로를 차별화 할 수 있는 사람,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면 지식의 많고 적음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사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회사에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4년제대를 나왔든 전문대를 나왔든 회사에 들어와 새롭게 배워야 한다. 이때 차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차별화 없이 왜 나는 차별하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조금 뒤에서 출발하는 고졸이나 전문대 출신에게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 나에게 전문대란…

30여 년 전 입사한 롯데산업이 당시 여기 롯데기공에 있었다. 첫 출근을 여기로 했는데 대표가 돼 다시 왔다. 인하공전 근처이기도 하다. 학교도 그렇지만 굉장히 인연이 있는 곳이다. 작년에 대표를 맡아 순식간에 2년이 지났다. 2년이 정말 짧다. 아쉬울 만큼 짧은 학교생활 기간에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땄다. 돌아보면 내게 큰 자양분이 됐다. 내가 전문대 졸업생의 희망이나 목표가 된다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 때문에 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인천=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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