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연 정치부 기자) 각종 선거 때만 되면 여의도에서 ‘핫 플레이스’가 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서울 여의도 국회 앞 10층짜리 건물인 ‘대하(大河)빌딩’입니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거캠프를 차리고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특별하지 않은 이 건물이 ‘왕의 기운’이 서려 있는 명당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는데요.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를 앞두고 박지원 비대위원이 이곳에 선거 캠프를 꾸려 또 한 번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이 건물은 대통령만 3명, 서울시장만 2명을 배출하며 ‘정치1번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조순 전 부총리와 고건 전 총리가 이곳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후보의 외곽조직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2012년 대선 때대하빌딩 2층과 7층을 캠프로 사용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대하빌딩은 여야 정치인들의 선거용 캠프 명당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고 많은 건물 중 ‘대하빌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하빌딩은 평화민주당(평민당) 창당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7월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1987년 7월 사면복권 되고난 뒤 8월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상임고문이 됐지만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합니다. 이후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11월 평민당을 창당해 총재 겸 대통령 후보가 되지만 대선에서 낙선합니다.
11월 평민당을 창당할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당사 물색은 ‘비밀리’에 이뤄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비서였던 강동원 새정치연합 의원으로 하여금 여의도에 당사를 구할 것을 지시합니다.
강 의원은 “안기부와 경찰 등 정보기관원의 미행을 따돌리는데 번번이 실패해 공덕동 로타리 제일빌딩에서 여의도까지 가는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강 의원은 “언론에서조차 김 전 대통령을 ‘재야인사’라고 보도하던 때였기에 김 전 대통령을 위한 당사라는 사실을 숨긴 채 눈 앞에 보이는 대하빌딩 9층에 위장 계약을 했다”며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을 안 건물 주인이 난리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나를 좀 살려달라’며 엘리베이터를 멈추는 바람에 매일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평민당 창당을 준비했다”며 “당시 여의도에서 평민당을 창당하자 나를 담당했던 정보과 형사들이 윗선으로부터 혼쭐이 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어쩔 수 없이’ 건물을 내줘야 했던 건물주 김영도 하남산업 회장은 그 때의 인연으로 13대 국회에서 평화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을 지내게 됩니다.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대하빌딩의 주가가 뛰어올랐으니, 김 회장 입장에선 그때 강 의원에게 빌딩을 임대해 주길 정말 잘한 셈입니다.
이렇듯 대하빌딩은 단순히 대선 후보를 많이 배출한 ‘명당’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하빌딩에 들어오는 정치인은 모두 선거에서 승리했을까요? 6 4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 때 김황식 전 총리와 이혜훈 최고위원이 대하빌딩에 캠프를 마련해 이목을 끌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정몽준 전 의원에게 새누리당 후보 경선에서부터 낙선해 ‘왕의 기운’도 가끔 예외는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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