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뭉텅이 규제완화'로 영화산업 살린 영국
관련 283개 기관 공동규약…영화지원 '원스톱 서비스'
촬영 쉬워지자 산업 2배로
"절차 까다롭고 지원 없다" 해외제작사, 한국 촬영 꺼려
[ 박수진 기자 ]
‘007 스카이폴’(2012년 개봉)은 007시리즈 탄생 50주년 기념작이라는 점 외에도 현지 화려한 촬영으로 화제를 모았다. 스코틀랜드와 중국 상하이, 터키 이스탄불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촬영해 개봉 후 123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당시 눈길을 끌었던 촬영지 중 하나가 영국 런던이었다. 영국 의회와 중앙정부 기관이 몰려 있는 화이트홀과 런던 지하철 내부에서 벌이는 숨막히는 추격전, 폭파장면 등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곳에서의 영화 촬영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다. 런던 시내에서 영화 촬영을 하려면 협의해야 할 기관이 20~30여개에 달했고, 협의 과정만 기관당 2~3개월은 족히 걸렸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 탓에 영화 제작사들은 손을 들었다.
영화 촬영이 줄자, 관련 투자가 줄었다. 채용 인력이 감소했음은 물론이다. 2003년 위기를 느낀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비영리 민간단체인 ‘필름런던(Film London)’을 조직해 관련 정부기관과 단체를 대상으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촬영 허가 절차를 간소화해야 영화산업이 살고, 일자리가 생기고, 관광산업도 활성화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지난달 20일 런던 시내 사무실에서 만난 안드리안 우튼 회장은 “영화인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넝쿨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280여개 부처 모아 원스톱 서비스
필름런던은 먼저 런던 내 주요 촬영지 허가와 관련된 유관기관들과 협의체 구성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런던시티와 31개 자치구, 런던시의회, 영국영화협회, 영국문화유산위원회, 그리고 영화 촬영 허가에 결정적인 권한을 가진 런던 교통국과 소방방재청 등 총 283개 기관이 포함됐다. 그리고 4년간 이들을 설득했다.
2007년 결과물로 나온 것이 ‘런던 영화 촬영에 관한 공동규약’이다. 이 규약은 런던 내 31개 자치구에 영화 제작 지원을 전담하는 부서(BFS)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적합한 영화 촬영지 추천부터 관련기관 협의, 촬영 후 회계 정산까지 지원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2007년 이 같은 규약이 만들어지자 수개월씩 걸리던 촬영 허가가 10일 이내로 단축됐다. 영화 제작 스태프가 5인 이하 소규모일 때는 3일밖에 안 걸린다. 허가 절차가 한곳에서 결정되는 ‘원스톱’ 지원체계가 완성된 것.
우튼 회장은 “2007년 규범이 만들어진 후 4년 만에 런던의 영화산업은 두 배로 커졌다”고 말했다. 촬영 허가 절차가 간소해지자 영화제작사가 모여들었고, 인근 대학교에서는 영화 관련 인력 양성에 나섰다. 현재 전 세계 메이저 영화사 8개 중 6개가 런던에 법인 또는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대학교(대학원 포함)에서는 2000~3000명의 영화전공 졸업자가 여기서 일자리를 얻고 있다.
런던시티의 성공 사례는 영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며 영화산업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는 2008년 이후 5년간 연간 300여편의 영화가 꾸준히 촬영되고 있다. 영국 영화산업 규모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다.
관련기관 따로 협의해야 하는 한국
서울의 상황은 어떨까. 지난 4월 서울에서 촬영을 마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져스2’ 사례를 보면 열악한 실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벤져스는 촬영 개시까지 무려 5개월의 사전협의를 거쳐야 했다. 그나마 어벤져스는 서울시가 관광 효과를 노리고 일을 성사시키려고 적극 나서서 촬영 여부가 빨리 결정된 경우다.
역사물로 1000만명 안팎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 광해와 역린, 관상 등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 영화는 당초 경복궁 등 서울시내 고궁에서 촬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허가를 받지 못해 서울 근교 세트장에서 촬영을 마쳐야 했다.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고궁 촬영은 촬영 인원이 30명 이상일 경우 ‘궁능활용심의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도록 돼 있다. 영화제작사는 위원회를 상대로 사전에 내용을 브리핑해야 하는데 다수 작품이 역사적 고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근철 서울영화진흥위원회 로케이션팀장은 “시내 영화 촬영에 대해서는 아직 시민들의 지원과 공감대가 적은 편”이라며 “어벤져스 같은 영화가 개봉돼 관광 효과 등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면 런던처럼 범지자체 차원의 촬영 지원을 위한 규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부장은 “런던은 제작 비용의 20~30%를 현금으로 돌려주는 강력한 인센티브(환급정책)까지 도입해 투자와 일자리가 선순환되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박수진 산업부 차장(팀장), 강현우 산업부 기자, 김정은 중소기업부 기자
런던=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