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주주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 안의 시행을 일단 연기하겠다고 한다. 어제까지의 입법예고 기간 중 전경련을 중심으로 기업들의 거센 비판이 제기되자, 이를 수렴하겠다며 전체회의 개최를 이달 24일로 애초 예정보다 2주 늦춘 것이다. 금융위는 문제가 되는 일부 조항을 삭제하거나, 예외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원안을 부분 손질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독소조항이 한둘이 아닌 모범규준이다. 특히 압권은 ‘충분한 수’의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CEO 및 임원을 추천하도록 한 조항(14조)이다. 상법상의 주주권을 침해하는 위법적 가이드라인이라는 지적이 당연히 나온다. 기관투자가, 금융소비자, 공익단체 등이 참여할 임추위가 어떻게 유능한 CEO 후보를 평가해 뽑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연히 주주가 있는 민간 금융회사인데 정부가 지배구조에 간섭해 주주 권한을 무력화하고 사외이사들의 권한만 잔뜩 키워놓으려 한다.
과반수 사외이사로 구성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서 사외이사를 추천하라는 조항(9조)도 그렇다. 사외이사 보고 사외이사를 뽑으라는 얘기와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이런 모범규준은 주인 없는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증권 보험 카드 등 전 금융권에 걸쳐 자산 2조원 이상인 118개사에 전면 적용될 예정이다. 이대로 규준이 시행되면 사외이사의 무한권력 시대가 열리고, 금융회사마다 사외이사에게 줄을 서는 희한한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KB금융 사태는 주인 없는 은행에서 사외이사들이 책임은 없이 절대권한을 행사해왔던 데서 벌어졌다. 금융위는 KB금융 사태를 막겠다면서 되레 사외이사들의 천국으로 만들어 제2, 제3의 KB금융 사태를 부르려는 모양이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가 문제가 된 이유는 바로 관치금융에 있다. 주인 없는 금융회사를 만든 게 문제였다. 우리금융지주를 민영화하겠다는 정부가 멀쩡한 민간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를 헝클어뜨려 주인 없는 회사로 만들려고 든다. 법적 근거도 없는 규제일 뿐이다. 깨끗하게 접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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