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정치 논리, 장수기업 代 끊길 판

입력 2014-12-03 21:48
수정 2014-12-04 04:18
가업상속 지원法 무산 파문

1만5000여 中企 세대교체 '빨간불'


[ 김정은 기자 ] 가업(家業) 승계에 걸림돌이 되는 상속·증여세 부담을 덜어주는 내용의 ‘상속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일부 국회의원의 ‘부자 감세(減稅)’ 공격에 밀려 막판 부결됐다.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가업상속공제 적용 대상 기업을 매출 3000억원 미만에서 5000억원 미만으로 확대하고, 증여 시 공제 특례 한도를 3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늘리는 내용이 핵심이다.

정부는 평균 업력이 8.6년에 불과한 한국 중소기업의 수명을 늘리고 경쟁력을 키우려면 상속세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독일이나 일본의 글로벌 강소기업 대부분이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에 걸쳐 성장한 가업 승계 기업이고, 기업을 매각해 현금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고해 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국회 본회의에서 ‘부자 감세 아니냐’는 정치 공세에 휘말리면서 일부 여당 의원까지 반대로 돌아섰다. 강상훈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협의회장(동양종합식품 회장)은 “상속세법 개정안 부결은 가업을 키우려는 기업인의 의지를 꺾는 것”이라며 “어떤 사람이 회사를 크게 키우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상속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됨에 따라 ‘명문 장수기업을 키우겠다’는 정부의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정책은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차질을 빚게 됐다.

정부는 상속세 부담으로 인한 기업 폐업 및 사업 축소 등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수기업 육성을 고민해왔다. 2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이 세계에 7212개사(한국은행 2011년 자료)가 있지만 한국에는 단 한 곳도 없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워하는 곳은 정부뿐만이 아니다. 당사자들인 기업들도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2세·3세의 가업승계가 원활해져야 선진국처럼 ‘히든 챔피언’이 많이 나올 수 있는데, 상속세가 과도하고 자금 지원도 부족하다는 것이 많은 중소·중견기업 관계자들의 얘기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한 플라스틱 금형업체는 연간 매출이 3000억원을 넘는 강소기업이지만 가업승계 문제 때문에 기업을 매각해야 할지를 고심하고 있다. 상속공제 혜택을 받지 못하면 상속세만 300억원 가까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사장은 “수출에 기여하고 일자리도 늘리며 열심히 회사를 키워왔는데 돌아오는 것은 세금폭탄이라니 억울하다”며 “현금이 없기 때문에 가업을 자녀에게 물려줬다가는 기업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처럼 기업인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는 기업은 1만5000개사(중기중앙회 조사)에 달한다. 강상훈 동양종합식품 회장은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회사를 물려받았고 상속세를 내기 위해 건물과 아파트를 팔아야 했다”며 “상속세는 기업의 존망을 결정지을 만큼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2세·3세 기업인들이 상속세를 낼 돈이 없어 주식 등 현물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많은 사람이 기업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각종 부작용과 편법이 생기고 있다”며 “선진국처럼 가업승계를 양지로 끌어올리고 법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원익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은 “정치권에 대한 설득과 사회적 합의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며 “정부의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를 통해 관련 내용을 다듬고 정부와 협의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보겠다”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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