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제2의 KB금융지주 사태를 막겠다며 최근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문제 덩어리다. 모범규준은 내달 10일부터 자산 2조원 이상인 은행 증권 보험 카드 등 118개사에 적용된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게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다. 모범규준 14조에선 금융회사들이 ‘충분한 수’의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임추위를 상시 운영해 CEO 후보 추천, 임원자격 설정 등을 담당토록 했다. ‘충분한 수’를 강조한 것은 임추위에 기관투자가, 금융소비자, 공익단체 등의 참여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낙하산을 막자는 취지라고 하지만 금융사의 공익회사화가 필연적이다.
대주주가 모호한 은행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주인이 분명한 2금융권에까지 무차별 적용하는 것은 주주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주인이 있는 금융회사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무자격자를 CEO에 앉힐 리 만무하다. 능력도 수준도 안 되는 ‘관피아’ ‘정피아’들이 낙하산으로 차고앉은 게 문제인 것을 주주의 권한까지 제한하고 말았다. KB 사태를 빌미삼아 2금융권까지 관치 영향권에 두려는 의도라는 의심을 살 만하다. 상법에 명시된 주주의 권한을 행정지침에 불과한 모범규준이 핫바지로 만들고 있다.
아울러 모범규준은 사외이사의 자기권력화를 막겠다며 임기도 줄이고 평가도 받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과반수 사외이사로 구성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도록 했다(모범규준 9조). 뜯어놓고 보면 사외이사가 사외이사를 추천하라는 얘기나 다를 게 없다. KB 사태를 계기로 모범규준을 만들었는데, KB처럼 사외이사들이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자기권력화를 강화한 꼴이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가 낙후된 것은 제도가 미비해서가 결코 아니다. 과거 금융스캔들 때마다 금융당국이 모범규준을 쏟아냈지만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작동이 안 되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관치금융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어떤 모범규준도 소용이 없다. 정부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 못 하는 모범규준이야말로 악성 규제 덩어리다. 대체 누가 이런 규제를 만들어 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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