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향기] 세이코, 첨단 설비와 日장인정신의 결합…무브먼트의 정교함 스위스 넘어섰다

입력 2014-11-24 07:01
수정 2015-01-11 13:39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런스 2014


[ 임현우 기자 ]
일본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2시간가량 달리면 이와테현의 모리오카역에 도착한다. 버스로 갈아탄 뒤 창밖의 아기자기한 일본식 주택과 고즈넉한 소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20분 정도 달리니 10만㎡(약 3만평) 땅에 들어선 깔끔한 최신식 건물에 닿았다. 일본 시계업체 세이코의 생산기지 중 하나인 모리오카 공장이다. 세이코가 전 세계 유력 매체를 초청해 생산설비를 공개한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런스 2014’에 국내 언론으론 유일하게 한국경제신문이 다녀왔다.

장인정신과 현대 기술의 결합

1881년 시계장인 핫토리 긴타로가 일본 도쿄에 작은 시계 수리점을 열면서 탄생한 세이코는 ‘일본 시계의 자존심’으로 통한다. 일본 특유의 절제된 디자인과 뛰어난 기술력이 매력으로 꼽힌다. 세이코의 강점은 저렴한 쿼츠(배터리로 작동하는 전자식) 시계부터 매케니컬(태엽으로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까지 직접 만든다는 것이다. 창업자의 증손자인 핫토리 신지 회장은 “세이코는 어떤 사양과 가격대의 제품이든 100% 자체 생산하는 회사”라며 “전통적인 시계 제조법과 현대적 기술을 접목하는 데 강점을 보여 왔다”고 말했다.

모리오카 공장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공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기술강국’ 일본다운 최신식 자동화 설비와 ‘장인정신’이 깃든 시계 장인들의 역량이 강하게 결합된 인상이었다. 저가 쿼츠 시계에 들어가는 무브먼트(시계의 핵심 부품인 동력장치)의 생산라인에서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기계 돌아가는 소음으로 분주했다. ‘30,165’ ‘30,166’, ‘30,167’…. 쿼츠 무브먼트가 거대한 기계에서 척척 조립돼 나오자 그날의 생산량을 표시하는 전광판의 숫자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공장 관계자는 “조립의 전 과정이 자동화돼 매월 1000만개의 쿼츠 무브먼트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시계산업 뒤흔든 주인공

우리가 부담 없는 가격으로 쿼츠 시계를 살 수 있는 건 세이코가 없었다면 한참 뒤에야 가능했을지 모른다. 세이코는 1969년 ‘아스트론’이라는 이름의 세계 최초 쿼츠 시계를 출시해 시계 산업사(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회사다. 출시 당시 가격은 도요타 자동차 한 대값에 맞먹는 45만엔에 달했지만, 세이코가 이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다른 업체에 개방한 데 힘입어 빠르게 대중화됐다.

이런 역사 때문일까. 세이코는 한국에서 ‘중저가 브랜드’로 인식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급 기계식 시계로도 세계 각지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행사에 동행한 영국 시계전문지 이스케이프의 앵거스 데이비스 기자는 “세이코는 실제 기술력에 비해 브랜드 이미지가 다소 저평가돼 있다”며 “‘그랜드 세이코’ 같은 고급 라인은 유럽 시계시장에서도 가격 대비 고품질로 평가받는다”고 전했다.

스위스보다 높은 정확도

1960년 첫선을 보인 그랜드 세이코는 이 회사가 ‘세이코의 심장’이라 표현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컬렉션이다. 기계식의 9S 시리즈, 전자식의 9F 시리즈, 두 방식이 조합된 9R 시리즈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모리오카 공장에서는 이 중 최고급 사양인 기계식의 그랜드 세이코를 생산한다.

그랜드 세이코 생산파트에서는 앞서 구경했던 쿼츠 생산라인과 달리 장인들의 손길이 구석구석에 닿는다. 부품 생산, 패터닝, 밸런스 조정, 조립 등 단계별로 공간이 나뉜 가운데 흰 가운과 모자를 착용한 전문 인력이 대거 투입됐다. ‘마이스터’라 불리는 시계 장인들의 작업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신체 치수와 작업 스타일에 따라 특별 제작된 원목 탁자 20여개가 놓인 이곳에선 시계장인들이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작업할 뿐 적막이 흘렀다. 25년 경력의 카츠오 사이토 씨는 “최고급 제품에 탑재되는 9S86 무브먼트를 조립하는 것이 나의 업무”라며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무브먼트라 하루에 두 개씩만 만든다”고 말했다.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 시계 하나가 완성되는 데는 최소 1000시간, 41일 이상이 걸린다. 시간의 정확성에서 스위스 명품보다 훨씬 다양하고 까다로운 검사 기준을 적용, 이를 모두 통과한 제품만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부품을 조립한 뒤 무브먼트를 검사하는 데 17일, 이후 케이스를 조립한 뒤 완제품 상태로 검사하는 데만 7일이 걸린다.


“일본인의 섬세한 손 거친 名品”

현장에서 만난 공장 관계자는 유럽 시계와 대비되는 일본 시계만의 특징을 묻자 “일본인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일본인의 손은 섬세합니다. 우리는 제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 포인트에서 반드시 사람의 손으로 직접 점검해요. 스위스 시계 브랜드 중에선 알고보면 이런 단계를 기계로 해결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세이코의 숙제는 중저가 브랜드로 저평가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랜드 세이코의 경우 일본 내 입지는 매우 탄탄하지만 해외 판매는 2010년에서야 시작했다. 핫토리 회장은 “전통적인 시계 명가의 관점에서 만든 고급스러운 제품을 늘려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이코는 한국 시장에서도 300만~1000만원대의 그랜드 세이코 판매를 강화할 방침이다.

모리오카=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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