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화 연일 급락하자 자유변동환율제 전격 도입
APEC에 온 푸틴, 시진핑·아베와 '자원외교' 총력
[ 김은정 기자 ]
계속된 루블화 가치 급락으로 러시아에 ‘외환위기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외환시장 개입에도 루블화 가치 하락세가 지속되자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자유변동환율제를 전격 도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제재로 타격을 입고 있는 러시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동진(東進)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루블화 가치, 올 들어 약 38% 급락
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 들어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미 달러화 대비 38% 급락했다. 전 세계 통화 가운데 하락 폭이 가장 크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서방 국가와의 갈등이 격화된 데다 주요 수출품인 원유 가격마저 크게 떨어져 러시아 경제가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루블화 가치 하락이 가팔라지자 러시아 중앙은행은 이날 성명을 통해 “루블화 환율 방어를 위한 무제한적 외환시장 개입을 폐지하고 완전 자유변동환율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루블화 환율 변동폭을 중앙은행이 정하던 기존 방식을 폐지하고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초 내년 1월1일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2개월 앞당겼다.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이 오히려 루블화 기반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의식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한 달 동안 러시아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를 위해 매도한 달러가 290억달러(약 31조6900억원)에 달한다”며 “어설픈 개입이 오히려 투기 세력의 움직임만 키웠다”고 비판했다. 이날 자유변동환율제 도입 발표 후 루블화는 2.4% 반등했다. 하지만 루블화 약세를 돌리진 못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러, 외채 상환 능력 의심받아
루블화 가치 하락에 러시아 기업과 은행들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외채상환 능력을 의심받고 있다. 러시아 기업과 은행들이 갚아야 할 총 외채는 각각 4220억달러, 1920억달러 정도다. 연내 갚아야 할 외채만 각각 300억달러, 100억달러다. 리서치업체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서방 국가의 경제 제재로 기업 실적과 주가는 폭락하고 달러화가 대부분인 외화 표시 회사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며 “루블화 가치 하락이 지금 추세라면 러시아은행은 220억달러의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 노무라증권은 “최근 루블화 가치 급락은 러시아인에게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며 “사상 최고인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러시아는 1998년엔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할 정도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고,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루블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200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경제 악화로 다급해진 푸틴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는 등 대(對)아시아 외교 보폭을 넓히고 있다. 중국과는 연간 300억㎥ 가스를 추가 공급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맺었다.
○서방 추가 제재·유가가 최대 변수
하지만 러시아 경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러시아 경제성장률을 0.2%로 예상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내년에 제로성장(0%)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가 하락의 타격이 큰 데다 서방 국가의 경제 제재 수위가 더욱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2015~2017년 예산을 책정하면서 유가(북해산브렌트유 기준)를 배럴당 100달러로 산정했다. 배럴당 80달러대 초반인 현재 수준을 크게 웃도는 가격이다. 정부 세입의 절반을 석유와 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로선 타격이 불가피하다. 서방의 경제 제재 수위가 더욱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친(親)러시아계 우크라이나 반군이 자체 수장을 뽑는 선거를 강행하고, 러시아가 이를 인정하자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추가 제재를 경고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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