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사] 달걀 3개에 1000조달러…손쉬운 통화증발이 부른 경제의 역습

입력 2014-11-07 18:13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34) 독일·짐바브웨의 하이퍼인플레이션

1923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1년간 물가 100억배 상승

2000년대 짐바브웨서도 발생
급격한 물가 상승에 따라
결국 자국 화폐 포기하기도

금본위제 아니라면
중앙은행, 무한 통화증발 가능
돈찍어 재정지출 해결하면
장기적으로 더 큰 고통 불러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급격한 물가상승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달 물가상승률이 50%를 넘어서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으로 여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화폐는 더 이상 지급수단으로 사용되지 못한다. 화폐를 갖고 있는 것은 손해이므로 물건의 판매 대가로 화폐를 받지 않으려 한다. 화폐를 갖게 되더라도 즉각 실물자산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경제에서 화폐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물물교환 때처럼 거래가 불편해지면서 생산은 위축돼 국민소득이 감소하고 실업은 증가한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22년 8월 물가상승률이 50%를 넘어선 이후 1923년 11월까지 물가는 100억배 올랐다. 월평균 물가상승률이 322%에 달했다. 1921년 0.3마르크이던 신문 1부 가격은 1923년 9월 1000마르크, 10월29일에는 100만마르크로 급등했다. 이로 인해 1922년 2분기에 0.6%였던 실업률은 1923년 4분기에 28.2%로 높아졌다. 1923년 산업생산은 전년에 비해 40% 가까이 떨어졌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21세기 짐바브웨에서도 발생했다. 짐바브웨는 독일보다 심했다. 2007년 4월 월간 물가상승률이 50%를 넘었다. 2008년 7월 그해의 물가상승률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는데, 월간 상승률이 2500.2%였다. 2009년 7월 중앙은행이 발행한 1000조 짐바브웨달러는 달걀 3개 정도 가치에 불과했다. 짐바브웨달러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외국 화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2008년의 실업률은 94%에 달했다. 2008년 실질국민소득은 전년 대비 17% 하락했는데, 53년 전 소득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통화의 지속적 증가로 초래된다. 금본위제에서 통화는 지속적으로 오르기 어렵다. 하지만 금과의 태환성이 단절된 관리통화제도에서 중앙은행은 이론적으로 통화를 무한정 증가시킬 수 있다. 중앙은행은 정치적 환경에 따라 통화증발 압력에 직면한다. 정부가 복지나 무상교육 등 포퓰리즘 정책을 실시하면 다른 지출을 줄이거나, 조세를 올리거나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조세 증가는 저항이 심해 정치적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심각한 재정 적자가 우려되는 상황이면 국채 발행도 쉽지 않다.

이때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한 국채 매각이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 국채를 무한정 인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도 제1차 대전의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독일 제국은행이 금본위제를 유보하고 국채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1913년 130억마르크였던 통화는 전쟁이 끝났을 때 600억마르크로 올랐다. 전후에 바이마르공화국이 급격한 사회개혁을 시행하면서 교육, 복지비 지출도 급증했다.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전후 배상금이었다. 전후 배상금도 결국 통화발행을 통해 조달한 것이다.

독일이 금본위제를 유지했다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금본위제에서 정부지출을 늘리려면 조세수입이나 민간의 국채 인수가 늘어야 한다. 전쟁 배상금이 막대하더라도 이 방법을 택했더라면 생활은 어려워졌겠지만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짐바브웨도 마찬가지다. 짐바브웨는 로디지아 시절 소수 백인 정권과의 내전을 치르며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초기엔 흑백 간에 화합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997년 들어 정부는 선심 정책으로 독립전쟁 참전 군인들에게 막대한 보상과 연금을 약속했다. 이는 국민소득의 3%에 해당하는 규모로, 재정지출을 55% 늘려야 가능했다.

게다가 재정지출에 대한 고려 없이 백인들의 토지를 강제 매수해 흑인들에게 재분배한다는 정책도 발표했다.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미국 달러에 대한 짐바브웨의 통화가치는 하루 만에 75% 폭락했다. 노조의 저항 때문에 조세를 올릴 수 없었던 정부는 중앙은행 차입과 국채의 강제매각을 통해 재정을 조달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정부의 중앙은행 차입금은 2003년 1억짐바브웨달러에서 2008년 10조짐바브웨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약 10만배 증가했던 것이다.

종잇조각에 불과한 화폐를 거래에 사용하는 것은 화폐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이런 신뢰를 이용하면 통화발행으로 재정적자를 메울 수 있다. 증가한 통화가 여전히 거래에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들의 부를 공짜로 이용한다. 하지만 정부가 국민들의 화폐에 대한 신뢰를 배신해 통화를 증가시키면 국민은 더 이상 화폐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나타난다. 이때 국민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화폐를 버리는 것이다. 짐바브웨에서처럼 자국 통화를 버리고 외국 통화를 선택하는 것이다.

관리통화제도가 존재하는 한 중앙은행의 국채 인수를 통한 통화 증가는 언제나 가능하다. 명분만 주어지면 통화발행을 통한 국채 인수는 쉽게 이뤄진다. 유럽 재정위기 때 일부 국가의 국채가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자 결국 유럽 중앙은행이 이를 인수했다. 미국도 금융위기 때 중앙은행(Fed)이 국채를 매입했다. 이로 인한 통화의 증가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다.

고통 없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다.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재정지출을 중앙은행의 통화증가로 해결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고통을 불렀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재정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우리 경제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정기화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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