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Practice - 피아트 크라이슬러
세계대전 때 군수품 납품…伊 대표기업으로 급성장
알파 로메오·마세라티 인수…국민차 절대적 이미지 구축
경영진 연이은 실책으로…유럽 점유율 한때 5%대로
구원투수 마르치오네…과감한 구조조정으로 회생
印·中 등 공략…판매 확대 나서…과거의 명성 되찾을지 주목115년
1899년…토리노서 설립
13.8%…1990년 유럽 시장점유율
4억달러…2006년 흑자
[ 김순신 기자 ]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듣기만 해도 자동차 마니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명차 브랜드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꿈꿔보는 이런 드림카를 만드는 회사는 바로 115년 전통의 이탈리아 자동차 기업 피아트다. 올초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지프와 대형 세단 300C로 유명한 크라이슬러와 합병하며 피아트 크라이슬러(FCA·Fiat Chrysler Automobiles)로 재탄생한 피아트는 이제 세계 7위 제조사로서 르노, 포드,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빅5’를 바짝 뒤쫓고 있다. 오랜 업력만큼이나 부침이 많았던 피아트가 독일의 폭스바겐과 유럽 자동차 시장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 세계 자동차 전문가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115년 전통의 이탈리아 국민차
1890년대 후반 유럽을 여행하던 사업가 지오바니 아넬리는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고국인 이탈리아의 자동차 산업은 턱없이 낙후돼 있었다. 자동차는 당시 워낙 고가로 부자를 위한 장난감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지오바니의 생각은 달랐다. 자동차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어서는 안된다는 것. 값싸고 성능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그는 189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서쪽으로 200㎞가량 떨어진 북부 대도시 토리노에 피아트(FIAT)를 설립한다. FIAT는 ‘이탈리아 토리노 자동차 공장(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의 영문 앞글자를 따 만들었다.
1908년 미국에 진출할 정도로 지오바니는 적극적으로 사업 확장에 노력했지만 창립 초기 피아트의 경영 환경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사치품이던 자동차의 마땅한 수요처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2차 세계대전은 피아트에 큰 기회가 됐다. 이탈리아 정부에 군수품을 납품하게 된 것. 트랙터에서 전투기까지 이탈리아 군대가 필요했던 바퀴 달린 모든 물건이 피아트를 통해 생산됐다. 이 과정에서 피아트는 승용차와 상용차를 비롯해 농기구 및 건설기계, 야금, 생산 시스템, 항공기, 부품, 출판 및 통신, 보험 등 9개 분야 사업체를 거느리는 이탈리아 대표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피아트는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들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1969년 당시 이탈리아 3위 업체인 란치아를 인수했고 분리 예정인 페라리의 지분을 취득했다. 1차 오일쇼크를 거친 후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75년 네덜란드에 상용차 브랜드 ‘이베코’를 설립했다. 1987년 알파 로메오, 1993년 마세라티를 인수하며 이탈리아 내 승용차 시장에서 이탈리아 국민차로서의 절대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경영진의 연이은 실책 위기를 만들다
1970~1980년대 피아트는 그 어느 때보다 기세가 등등했다. 폭스바겐과 유럽 자동차업계 선두 자리를 넘볼 만큼 거대한 자동차 왕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경영진의 그릇된 판단이 조금씩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피아트는 전통적으로 해외보다 내수를, 중·대형차보다 소형 차종 중심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1980년대의 우노(Uno)와 1990년대 푼토(Punto)에 의존하면서 시장 수요의 다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전체 유럽 시장점유율도 뒷걸음질쳤다. 1990년만 해도 13.8%로 폭스바겐에 이어 2위였지만 2002년 8%, 2004년 11월에는 5%로 최저점을 기록했다.
하락하는 판매량을 좌시할 수 없었던 피아트그룹 경영진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세계화 계획’이었다. 월드카로 ‘피아트 178’을 신규 개발해 유럽 이외의 시장에서만 100만대를 생산, 판매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었다. 피아트는 이 프로젝트에 15억달러라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지만 실패했다. 1990년대 말 불어닥친 중남미 국가들의 재정 위기와 폴란드·터키 등지에서의 판매 저조 때문이었다.
2003년 1월 지오바니 아그넬리 명예회장이 사망하자 투자자들 사이에선 피아트가 부도가 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나서서 비틀거리는 피아트를 공기업화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같은 해 움베르코 아그넬리 피아트 회장은 깜짝 발표를 했다. 그는 “피아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며 “아그넬리 가문이 피아트를 재생시킬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2004년 위기의 피아트를 구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회계사 출신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가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됐다.
○마르치오네의 마법 피아트를 구하다
마르치오네 CEO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시작한다. 그는 취임 직후 50일 동안 보험 부문 자회사를 25억달러에, 항공우주 부문 자회사를 17억달러에 매각했다. 이어 “지난 10여년간의 다각화를 접고 자동차 부문에 집중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2005년 피아트의 관리직 간부 2000여명을 해고했다. 그 대신 젊고 유능한 중간 관리자를 간부로 승진시켰다. 푸조, 포드, 타타모터스, 상하이 자동차 등 8개 회사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생산비 절감 및 해외 진출에 나섰다. 구조조정의 결과 피아트는 2년 만에 4억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신차 개발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2007년 등장한 ‘피아트 500(친퀘첸토)’의 신형 모델은 유럽 시장 판매량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2009년 마르치오네 CEO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여파로 휘청거리던 크라이슬러를 인수했다. 크라이슬러는 이탈리아 재정 위기로 타격을 입은 피아트가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 역할을 했다. SUV와 중대형 세단을 판매하는 크라이슬러의 제품군은 피아트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웠다. 경차 피아트 500부터 SUV 지프, 스포츠카 페라리까지 완벽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갖춘 FCA가 글로벌 톱 5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다.
마르치오네 CEO의 눈은 급성장하고 있는 인도와 중국 자동차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연간 자동차 판매량을 지난해 435만대에서 2018년까지 680만대로 끌어 올리겠다”며 “중국과 인도에서 새로 출범한 합작사가 연간 70만대의 판매를 기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눈을 돌려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 “판매 증가와 함께 부채는 줄이기로 했다”며 “앞으로 5년 안에 100억유로(약 14조3000억원)에 달하는 순부채를 90%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