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통법 '청부입법' 전말
"가계통신비 年50만원 절감" 관료 말만 듣고
의원 10명이 발의…법안 심사 두 차례뿐
미방위, 1년 방치하다 법안 131건과 일괄처리
[ 손성태/안재석 기자 ]
작년 5월8일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미래창조과학부 주최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방안’. 휴대폰 제조회사의 출고가와 통신사의 보조금 공개, 대리점과 판매점의 위법행위에 대한 과태료 부과 등 법률 개정이 필요한 강도 높은 방안이 논의됐다. 곧이어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는 “통신 3사의 이동전화 가입 보조금 지급과 관련한 시장 조사에 착수했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엔 국회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은 같은 달 27일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이라는 긴 이름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기에는 권은희 남경필 김성찬 홍지만 등 9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동참했다. 정부가 청탁해 의원들이 대신 법안을 발의하는 ‘청부 입법’의 전형적 절차를 밟은 것이다. 그만큼 법안 발의까지 걸린 시간이 짧았다. 정부 입법은 법안 제출까지 8~9개 절차를 거쳐야 한다. 6개월 이상 걸리는 게 다반사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활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의원 10명만 찬성하면 즉시 법안을 낼 수 있다. 까다로운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사도 거치지 않는다. 예산 문제도 피할 수 있다. 정부 부처가 어지간하면 청부 입법이라는 우회로를 선호하는 이유다.
‘미래부·방통위 연출, 조해진 의원 주연’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던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외풍에 제동이 걸렸다. 법률안을 처리해야 할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방위)가 KBS 사장 인사청문회와 민영방송사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설치 등의 정치적 이슈에 휘말려 파행을 거듭한 것. 그러곤 단통법은 곧장 ‘동면(冬眠) 모드’에 진입했다. 5000만명이 넘는 이동통신 가입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임에도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이뤄지지 못했다.
가끔 잠에서 깨기는 했다. 작년 12월23일과 올 2월26일 법안심사소위에 단통법이 상정된 것. 하지만 작년 말 소위는 국회 파행으로 여당 의원들만 참석했다. 또 두 번의 소위에선 “단통법은 가구당 연간 50만~60만원의 절약효과가 있다”(윤종록 미래부 2차관)는 정부의 설명만 되풀이됐다.
국가정보원 감청 논란으로 한동안 다시 뒷전으로 밀려났던 단통법은 지난 6월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햇볕을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언론으로부터 미방위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 일이 뭐냐는 게 골자였다. 미방위는 출범 2년 동안 단 5건의 법안을 의결했다. 자구수정 등 미세 조정을 제외할 경우엔 법안 처리 건수는 한 건에 불과했다. ‘식물 상임위’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던 상황. 여기에 세월호 참사(4월16일)까지 터지며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
등 떠밀린 미방위는 결국 4월30일 먼지가 소복이 쌓인 법안들을 다시 꺼내들었다. 모두 132건. 그중 한 건인 단통법은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일괄 타결’이라는 문구에 묻혀 두루뭉술 넘어가버렸다. 이날 132건의 법률안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88분. 분당 1.5건의 안건이 미방위를 통과했다. 단통법에 대해선 “이견 있습니까”라는 한선교 미방위원장의 질문과 “없습니다”라는 미방위원들의 합창이 전부였다. 5월2일 열린 본회의에서도 단통법은 번갯불에 콩 볶듯 처리됐다. 재석의원 215명 가운데 213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는 한 표도 없었다. 반대 토론도 생략됐다. 이상민·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만 기권표를 던졌다.
단통법 발의 후 통과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그러나 어느 순간을 잘라내도 진지함은 찾기 어려웠다. 통신시장 관계자는 “법률 시행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개정안이 쏟아지는 것만 봐도 단통법이 얼마나 졸속으로 처리됐는지 알 수 있다”며 “19대 국회 전체가 직무유기의 공범”이라고 지적했다.
손성태/안재석 기자 mrhand@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