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리포트] '골드 파워' 넘보는 아시아…상하이 등 金거래소 릴레이 개장

입력 2014-10-26 22:27
수정 2014-10-27 03:40
국제 금값 주도권, 美·英서 아시아 이동 중

금 최대 소비처는 아시아
'쌍두마차' 중국·인도, 세계 수요량 절반 넘어…美·英은 5.8%에 그쳐

런던 '금값 나침반' 오점
'가격 결정 은행' 바클레이즈 담합으로 벌금 부과에 도이치뱅크 등 조사 '몸살'

"亞시장 영향력 키우려면 금 가격 공동 산출해야"


[ 김태완 기자 ] 아시아 금융 도시들이 세계 금시장 주도권 쟁탈전에 나섰다. 서울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 등이 올해 잇달아 국제 금거래소를 설립했거나 유치할 예정이다. 런던과 뉴욕이 주도적으로 결정해온 글로벌 금가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금은 지난 1세기 동안 실물 거래는 동양이, 가격은 서양이 주도하는 기이한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지난 9월 상하이에서 국제 금거래소가 문을 열자 중국의 경제관찰보는 “중국은 세계 최대의 금 생산국이자 소비국”이라며 “앞으로 금가격 결정권이 서양에서 동쪽으로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시아, 세계 금 수요의 3분의 2 차지

한국거래소는 지난 3월 금거래소를 설립했다. 이어 상하이가 지난 9월 상하이자유무역지대 내에 국제 금거래소를 개장했고 10월에는 싱가포르가 그 뒤를 이었다. 뉴욕에서 상품거래소를 운영하는 CME그룹도 연말쯤 홍콩에 금 선물시장을 연다고 발표했다. 아시아 주요 도시가 금거래소를 잇달아 설립하는 것은 이들 지역에서 금이 중요한 투자수단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국제 금거래소 증가는 금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아시아의 금거래소 전망을 밝게 보고 있다. 아시아에서 금 거래가 워낙 활발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금을 주로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사용한다. 반면 아시아에서 금은 부(富)의 저장수단이다. 보석이나 금화 등은 물론 골드바 수요도 많다.

특히 중국과 인도가 세계 금 소비의 쌍두마차다. 세계금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을 기준으로 1년간 중국과 인도의 금 수요량은 각각 1016.9t, 774.7t으로 세계 1, 2위다. 이 두 나라의 금 수요량은 세계 수요량 3419.6t의 절반이 넘는 52.4%다. 여기에 태국(105t) 인도네시아(63t) 일본(25.2t) 홍콩(45.1t) 한국(15t) 등 아시아 각국의 수요를 합치면 세계 수요량의 3분의 2를 넘는다.

반면 세계 금가격을 결정하고 금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174.4t)과 영국(24.8t)은 세계 금 수요의 5.8%에 머물렀다. 쉬뤄더 상하이황금거래소 이사장은 “상하이 금거래소의 금 출고량은 이미 세계 생산의 60%나 된다”고 말했다.

런던 금가격 신뢰도 추락

아시아가 세계 금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오겠다고 벼르는 데는 런던 금가격의 신뢰도 추락이 한몫했다. 현재 세계 금가격은 현물은 런던에서, 선물은 뉴욕에서 사실상 결정한다. 매일 런던에서 두 차례 발표되는 금가격이 각국의 중앙은행은 물론 광산업자 귀금속업체 거래의 기준이 된다. 세계 증시에 상장된 금 상장지수펀드(ETF)를 비롯한 금 관련 파생상품도 ‘런던 금가격(London Gold Fix)’에 따라 움직인다.

이 금가격은 5개 은행이 경매 방식을 통해 결정한다. 그런데 지난 5월 영국 금융당국은 파생상품계약에 대한 지급을 회피하기 위해 금가격을 조작한 혐의로 5개 은행 중 하나인 바클레이즈에 2600만파운드(약 440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독일의 금융감독기구인 바핀(BAFIN)도 5개 은행 중 하나인 도이치뱅크에 금가격 결정 과정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미국의 금융당국도 금가격 결정 은행들이 담합을 통해 가격을 조작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리보금리 조작사건’에 이어 터진 금가격 조작 의혹으로 런던 금융시장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런던 금가격 결정이 투명하지 않고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은 그동안 수차례 제기됐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대의 앤드루 카민스치와 리처드 힌니 교수의 연구 결과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2007~2012년 6년간 런던 금가격 데이터를 바탕으로 금 파생상품 거래자들이 현물가격의 방향성을 어떻게 예측했는지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금 기준가격이 발표되기 10분 전만 해도 50% 수준이었던 가격 방향성 일치율이 5분 전에는 80%로 치솟았다.

또 금 현물가격이 기준가격 발표 직전에 떨어졌다가 발표 직후 거래량 급증과 함께 오르는 현상도 자주 나타났다. 이런 연구 결과는 금 기준가격이 발표 전에 외부로 누출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뉴욕대의 로사 애브란테스-메츠 교수는 “금의 가격 결정 방식은 가장 기괴한 방법 중 하나”라며 “가격 결정 과정에서 은행 간 담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세계금위원회는 최근 금가격 결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글로벌 금업계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개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제 투자자 유치가 관건

아시아가 언제 금시장의 중심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많은 전문가는 아시아가 단기간에 런던의 자리를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 많은 금 관련 파생상품들이 여전히 런던의 금값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 근거 중 하나다. 더구나 가장 유력한 후보인 중국은 금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외국의 금값이 중국보다 비싸도 중국의 금은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가격이 신축적으로 조정될 수 없다. 라이언 케이스 불리온캐피털닷컴 법인영업 대표는 “상하이에서 국제 금값을 결정하겠다는 중국의 야심은 이런 규제 탓에 실현되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HSBC는 최근 중국을 포함한 신흥시장의 실물 수요가 금값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 연계 ETF를 포함한 금융상품의 자금 유출입에 따라 가격이 등락했던 장기 추세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캐러린 로 블랙록 매니저는 “아시아의 금거래소가 국제 투자자들을 충분히 끌어모은다면 금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의 공도현 금시장운영팀장은 “한국 터키 상하이의 금거래소는 공개된 경쟁시장이어서 장외시장인 런던에 비해 훨씬 투명하다”며 “아시아 주요 도시의 거래소들이 공동으로 금가격을 산출해 발표할 수 있다면 국제 금 시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金 기준가격 어떻게 결정되나
런던서 5개 은행 만나 경매방식 통해 발표

1919년 9월12일 아침, 런던에 있는 로스차일드 은행 사무실에 5명의 은행가가 모여들었다. 고풍스러운 오크나무 탁자 위에는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놓여 있었다.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사람은 브라이언 코케인 영국중앙은행(BOE) 총재. 1차대전이 끝난 뒤 10개월이 지났지만 금시장이 여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판단한 그는 주요 은행가들에게 금의 기준가격을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의를 주관한 로스차일드 측이 먼저 1온스당 4.92파운드를 기준가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경매에 참석한 나머지 4명의 은행가는 모두 금을 사겠다고 말했다. 몇 차례 흥정이 오간 뒤 이들은 수요를 반영해 금가격을 2펜스 더 올리기로 합의했다. ‘런던 금가격(London Gold Fix)’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95년간 런던 금가격은 세계 금시장의 기준이 됐다. 처음 금가격을 정했던 5개의 은행이 HSBC 도이치뱅크 스코샤은행 바클레이즈 소시에테제네랄 등으로 대체되고, 1968년 문을 연 뉴욕상품거래소 개장시간(오전 9시, 런던 시간은 오후 3시)에 맞춰 한 차례 더 가격을 발표하고, 2004년 전화회의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금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들 5개 은행은 매일 오전 10시30분과 오후 3시에 모여 금가격을 발표한다. 의장은 각 은행이 매년 돌아가면서 맡는다. 의장이 먼저 최초 가격을 부르면 다른 은행은 경매 방식으로 매수와 매도를 한다. 거래 금은 400온스(12.4㎏)의 골드바다. 매수·매도 주문량의 차이가 50바보다 적으면 가격이 결정된다.

회의는 항상 15분 내 끝난다. 회의 기록도 없다. 회의에서 가격과 거래량이 얼마였는지도 알 수 없다. 5개 은행이 담합을 통해 금값을 결정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태완 기자 tw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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